▲한산도 수루 사진수루 현판과 한산도 주련을 새로 걸었다(문화재청승인)
여해고전연구소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훌륭한 족적을 남긴 위인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위주로 철저한 수양생활을 하였다. 정제된 마음가짐이 인격형성을 좌우하고 그것이 바른 행동으로 발현되어 인간 생활에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이 통념이 된 유교사회에서는 특히 인간의 심성수양 문제에서 본심을 기르고 사욕을 살피는 존양성찰(存養省察)이 수양론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를 위한 인격수양의 방법으로는 무엇보다 항구여일한 노력과 실천이 중요하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끝까지 달성하기 어려우니 초지일관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공자(孔子)는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관철하고 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다(『논어』「이인」). 이는 공자가 제시한 인(仁)의 덕목이 인간의 활동과 관계된 모든 행위에 있어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역대의 병가(兵家)들도 장수가 지녀야할 덕목을 갖추기 위해 수양을 통한 한결같은 마음의 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주(周)나라의 병가 강태공은 "한 사람이 두 마음을 가지면 그 내부가 반드시 쇠망한다"고 하였다(『육도』「문벌」). 군대에서 두 마음을 가지면 장수와 병졸들이 서로 이반하여 망하게 된다. 진나라 말기의 병가 황석공(黃石公)은 "병폐는 한결같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병폐다"라고 하였고,(『소서』「본덕종도」) 당(唐)나라의 명장 이정(李貞) 은 "무리를 동원하는 것은 마음을 한결같이 하는데 달렸다"고 하였다(『이위공문대』). 장수가 군대운영에 있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결속을 다져야 군사를 잘 동원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최고 사상가 공자(孔子)의 도덕이론이 기초가 되어 역대 병가들도 군대운영에 심성수양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함께 하였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여 수양론자들의 공통된 지론이 된 만큼 역사적인 인물들의 족적과도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이에 우리의 역사에서 최고의 인물로 손꼽히는 이순신의 수양생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순신은 본래 천성이 강직하였고 어려서부터 매우 규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사적인 말을 하지 않았고 과거에 급제한 이후 출세를 위해 권력 있는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아첨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낮고 어려운 생활을 오래하였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설사 억울한 모함을 당해도 자신의 할 일에만 몰두하며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잃지 않았다.
임진왜란 중에 활약한 이순신의 족적을 살펴보면, 옥포해전 때는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이라는 명언을 남겼고, 사천해전 때는 거북선을 창조하여 일본선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의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었음에도 죽을만큼 다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특히 한산도해전에서는 병서이론에 근거한 기만전술, 육전에서 사용하는 학인진법을 해전에 처음 사용하여 적을 궤멸시켰다. 이러한 승전 사례를 볼 때 진영에서 남다른 수양과 병서 연구를 했기에 그런 일들이 가능하였다.
이순신은 임진년 5월부터 계사년 3월 중반까지 치열한 전쟁을 치른 뒤, 『난중일기』에는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심정을 담아 산발적으로 적은 잡문형태의 글들이 적혀 있다.
① 대장(大將)의 명령은 오히려 신중히 하여 가볍게 내려선 안될 것이니, 일이 비록 뒤의 것을 생략할 만큼 급속히 해야 할 것일지라도 인정과 형세를 살피고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계사년 3월 22일 이후<별록>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노승석 역주)
위 글을 보면 긴박한 전쟁 상황임에도 장수로서 오히려 경솔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지양하고 인정과 형세를 충분히 살핀 후에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후 6월 일본선 8백여 척이 부산과 김해에서 웅천·제포·안골포 등지로 옮겨 정박하였고, 수륙의 병력을 동원하여 서방을 침입하려는 뜻을 드러냈다. 이에 이순신은 이억기와 원균 등과 모의하여 적이 오가는 해상 길목인 견내량과 한산도의 바다 가운데를 가로막아 차단하는 데 주력하였다. 7월 15일 드디어 여수 본영에서 진영을 한산도 두을포(豆乙浦)[의항]로 옮기고, 한산도 바다의 가을 경치를 보고 자신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청랭해져
자려해도 잠들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秋氣入海 客懷撩亂
獨坐篷下 心緖極煩
月入船舷 神氣淸冷
寢不能寐 鷄已鳴矣
- 계사년 7월 15일(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노승석 역주)
한산도 의항에 머문 가을밤의 첫날 이순신은 멀리 떠나온 나그네의 심정으로 글을 적었다. 홀로 배 뜸 아래 앉아 앞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몹시 산란했는데, 환한 달빛이 배전을 비추자 어느새 정신이 맑아져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날밤을 새게 되었다.
그 후 이순신은 3년 8개월 동안 한산도에 주둔하는데 여기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됨에 따라 한산도가 본진으로써 해상작전기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때 이순신은 내륙에서 군수품 조달이 어려움을 들어 체찰사에게 해포 사용을 승낙받아 자급자족할 계획을 세웠다. 그 후 소금과 어물 등을 생산하여 몇 만석의 식량을 비축하고 한산도에 백성의 촌락이 형성되어 하나의 큰 진영을 이루게 되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근신과 절제로 수양하는 생활을 하였다. 전쟁대비를 위해 불철주야 작전을 모의하느라 밤새는 일이 많았다. 깊고 외로운 밤에 한산도 수루(戍樓)에 올라 홀로 깊은 사색을 하며 때로는 시를 읊고 때로는 작전을 모의하였다.국가의 지원도 없는 불모지 한산도에서 오히려 최고의 전략 전술을 내어 불패의 전공을 세운 것은 유학에서 중시하는 신독(愼獨, 혼자의 경지에서 근신함)의 자세로 고난과 역경을 승화시켜 전쟁을 철저히 대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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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 문화재전적 전문가.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현재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문화재청 현충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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