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유족회는 8일 오후 창원마산 가포동 위령탑에서 합동추모제를 지냈다.
윤성효
김동춘 "유족을 두 번 죽이는 일을 자행하고 있어"
1기 진실화해위 활동을 설명한 김동춘 교수는 추모사를 통해 "지난 2009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하순부터 8월 사이 경찰과 군인이 강제 연행한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1681명이 정당한 재판 없이 불법으로 살해됐다고 발표했다"라며 "2010년 6월 진실화해위는 마산형무소 관련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 결과를 통해 1950년 7월 5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최소 717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이 집단 살해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20세기 이 한반도와 세계 곳곳에서 비극적인 전쟁과 학살 사건이 많았지만, 6.25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그 비극성과 참혹함, 반인륜성에서 으뜸가는 사건이었다"라며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은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구천을 돌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꾸짖어 왔다"라고 했다.
이어 "늦었지만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이 이루어졌다. 이곳에 지난 2022년에 희생당한 민간인들 이름 석 자를 기록하는 위령탑이 건립된 것은 유족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라며 "제삿날도 모르고 무덤도 없는 희생자들을 기려온 유족들이 희생자 추모를 할 수 있게 됐다"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한국은 실정법을 어기지도 않은 민간인을 불법 연행하여 재판없이 죽였다. 이후 남은 가족들까지도 이런 비극을 일체 발설도 하지 못한 채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연좌제의 피해를 입혔다. 이웃과 사회로부터 온갖 비인간적인 수모를 당하게 만든 나라였다"라고 했다.
진실규명 관련해 그는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듯이 이 지역에서도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확인을 받은 사람은 희생자의 10%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알고도 진상규명 신청을 하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사건 이후 가족이 완전히 멸실되어 이제 후손을 찾을 수도 없는 희생자들의 영령이 여전히 구천을 떠돌고 있다"라고 했다.
이어 "2기 진실화해위가 설립되어 진상규명을 하고 있지만, 제2기 신청자를 모두 합해도 이 수는 희생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더구나 현 진실화해위원회는 억울한 희생자의 한을 풀기보다는 부역사건 희생자 중 일부를 들추어내어 오히려 우익 학살의 가해자임을 밝히려 한다. 유족을 두 번 죽이는 일을 자행하고 일로 진실화해위의 설립 취지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특히 그동안 이런 일을 외면해온 지방자치 단체, 지역 시민사회의 위로와 공감이 더욱 중요하다. 그동안 국가의 잘못 때문에 각종 불이익을 당해서 서로 간에 반목 갈등했던 가족 친척들도 이 기회에 사과와 화해를 하기를 기대한다"라고 했다.
홍남표 창원시장은 문상식 마산합포구청장이 대독한 추모사에서 "억울하게 숨져 가신 영혼을 위로하고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자유와 민주 그리고 평화' 아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역사적 사명이자, 마땅한 도리"라고 말했다.
김이근 창원시의회 의장은 추모사에서 "안타까운 희생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시민들에게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왜곡된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기를 희망한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74년 지난 올해 1월 형사재판에서 무죄 선고 받아"
올해 1월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열린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던 희생자 아버지한테 보내는 편지를 읽은 이두희 유족은 "아버지께 편지를 쓰려니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려 쓸 수가 없어서 식탁 위에 종이와 연필을 두고, 오며 가며 몇 줄씩 적어 봅니다"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와 저는 아무런 추억도 기억도 정도 남겨두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는 항상 저의 마음속에 계셨습니다. 아버지. 보도연맹 사건과 그리고 6·25 전쟁으로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후 온 가족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라며 "국가를 원망하고, '내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서로를 의지하면서 지내던 가족들도 이제 모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했다.
이두희 유족은 "6·25 전쟁으로 피난 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 지으셨던 새집은 불타버렸고, 아버지께서 기르던 임신한 큰 돼지도 흔적 없이 사라졌답니다"라며 "아버지께서는 아기 돼지가 태어나면 돼지농장을 꾸리겠다는 꿈이 있었으나,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아버지 없이 남겨진 어머니와 저는 외갓집에서 한동안 지내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이후 불탄 집을 다시 짓고, 흙과 돌로 만든 방 2칸짜리 오막살이에서 온 식구와 함께 어렵게 살았습니다"라며 "저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는 종종 5일 장에 가셔서 사탕 몇 개와 새끼줄에 묶은 갈치 몇 마리를 사 오시고는 사탕은 몰래 놔두셨다가 저에게 하나씩 꺼내주셨고, 갈치는 갈치살을 골라 저의 밥 위에 올려주시곤 하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조부모를 떠올린 그는 "할아버지 방에는 산과 들에서 캔 약초 달인 물과 알약이 항상 있었고, 나병환자가 구걸하러 집에 오면 쌀 한 되를 주고 나병환자의 약과 바꾸어 드셨으며, 항상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셨습니다"라며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보도연맹사건과 6·25전쟁으로 고생만 하시다가 제 나이 8살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떠올렸다.
이어 "할머니께서는 저의 철없는 질문에 종종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밤이면 초롱불을 켜 놓고 숙제를 하다가 '할머니! 다른 친구들은 아버지가 있는데 저는 왜 아버지가 없어요?'라고 할머니께 물으면, 할머니께서는 '아빠는 돈 벌러 갔다'고 하시면서 어느 날은 미국으로, 어느 날은 일본으로 갔다고 하셨고 '태풍이 불어 배도 비행기도 뜨지 않아 오지 못한다'는 대답만 해주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두희 유족은 "유난히 가족을 챙기셨다는 아버지께서는 가족들에게 한마디 말씀도 남기지 못하시고 며칠 동안 감금당하시면서,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가족을 두고 가는 슬픔과 걱정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을 것입니다"라며 "아버지. 이제 무거운 짐 거두시고 저 세상에서 마음 편히 계십시오. 아버지 딸 이두희는 지금 정말 행복합니다. 영령들이시여. 억울함과 악몽은 모두 잊으시고 전쟁 없는 나라에서 편히 계십시오"라고 인사했다.
김요아킴 시인이 추모시 낭송, 진효근씨가 색소폰 연주, 재두루미중창단이 합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