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씨는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재 거부 신고서를 작성하고 건강보험공단에 제출했다고 말했다. 이 경우에 굳이 절연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유지영
부양포기각서 작성하고 통장 까고... 쉽지 않은 세대분리
부모와 절연한 당사자면서 절연 청년 인터뷰를 진행했던 김혜미 작가는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관련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한다. 이 사람들에게는 돈이라는 보호막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 또한 절연 과정에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지만 부모의 재산 조회에 걸려 관련 지원을 받지 못했다.
기초생활 급여 등 신청은 단독 세대주만 가능한데 우리나라 주민등록법상 단독 세대주가 되려면 만 30세 이상이어야 한다. 30세 이전에는 결혼을 하거나 최저생계비 이상의 일정한 소득을 증명해야 단독 세대주가 될 수 있다.
가정폭력으로 2021년 스무살의 나이로 부모와 절연한 비줄(23)씨는 집에서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서 통장이랑 인감 도장부터 먼저 챙겼다. 그 정도로 매사에 야무진 그지만 그에게도 부모와의 행정적 절연은 쉽지 않았다.
비줄씨가 독립 세대주 자격을 얻으려면 만 30세까지 1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가 주민센터에 세대 분리를 신청했지만 끝없는 '서류의 늪'에 빠졌다. 그는 "다른 서류를 계속 요구하면서 3번 이상을 주민센터까지 오가게 만들다가 결국 전화로 내가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분리가 안 된다고 하고 끊더라"라고 말했다.
수급자 신청에도, 청년 주택에 지원하려 해도 절연한 부모는 끊임없이 '걸림돌'이 됐다. 결국 그는 주민센터를 다시 방문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상호 부양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부양 포기 각서'를 작성했다. 일정한 기간 동안 부모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수개월 간의 통장 계좌를 내보인 후에야 세대 분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기초생활 수급자를 신청하고 인정받는 데까지 상당히 오래 걸렸다. 굶어 죽기 직전에 안 죽었고 버틴다 싶으면 그때서야 내주는 느낌"이라면서 "(세대 분리가 안 됐을 때 가구 단위로 지급된) 코로나19 시기에 1차 재난지원금은 실제로 지급됐는지 잘 모른다. 알아서 부모님이 쓰셨을 것"이라고 답했다.
비줄씨는 "무엇이든 행정적으로 가능한지는 내가 다 알아보고 가서 요청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요청을 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부모와 단절하는 과정에서 일주일에 4번 이상 주민센터를 방문하면서 관련 절차를 담당 공무원 이상으로 꿰뚫게 됐다. 최근에도 습관적으로 청년 관련 정책 사이트를 방문하면서 바뀐 것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세대분리냐, 차상위냐... 양자선택 강요
한대윤(29)씨는 내년이면 30세가 돼 자동으로 세대 분리가 가능해진다. 그는 10년 전 동아리 방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기며 집에서 벗어나는 탈가정에 성공했지만 이후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해 오랫동안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
2023년 당시 한씨의 소득은 월 100만 원 정도로 차상위계층 조건이 충족됐다. 하지만 만 30세가 되지 않아 세대 분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30세 이전에 세대 분리를 하려면 최저생계비 이상인 월 130만의 소득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월 130만 원 이상 돈을 벌면 차상위계층 혜택을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2019년부터 생계급여 수급자의 경우 근로소득이 30% 공제가 되는 기준이 완화됐다는 사실을 알게 돼 좌충우돌 끝에 기초생활 수급자로 인정받게 됐다. 그는 집을 나온 지 10년이 지난 올해 초 LH 임대주택으로 이사했다.
한대윤씨는 "탈가정하지 않았다면 경제적으로는 더 윤택한 삶을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집을 나오고 후회한 적은 없다"라며 "부모와 같이 사는 친구들보다 더 주체적으로 나의 삶을 시작해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수정-삭제 불가한 가족관계등록부, 최선일까
이들 청년 3명은 입을 모아 현재 탈가정 정책 정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가구 단위로 이뤄지는 복지 혜택이 많기 때문에, 탈가정으로 경제적 자원이 전무한 자녀들이 지원을 받으려면 어려운 행정적 절차를 홀로 돌파해야 한다. 탈가정 청년의 목소리를 에세이로 묶어낸 282북스의 강미선 대표는 "탈가정 청년들이 대부분 과거를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기에 복잡한 행정적 단절 절차를 치르지 않는데, 그러면 복지 지원 등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게 된다"라고 했다.
탈가정한 이들은 가족으로 연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정과 삭제가 불가능하게 해둔 가족관계등록부를 절연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정과 삭제가 가능하게끔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그 관계는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미선 대표는 "걸림돌이 있음에도 뚫고 나갈 정도로 자립 정신이 투철한 청년들인데 행정이 계속 길을 막는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나아가려는 청년들에게 대단한 정책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하다 못해 나아갈 길을 밝힐 수 있는 작은 손전등이라도 쥐어주면 알아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7일 친족 사이에 재산 관련 범죄는 형을 면제하거나 고소해야 공소를 제기하게끔 해둔 특례인 '친족상도례'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단이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입법재량을 명백히 일탈해 현저히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것으로서 형사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침해한다"라면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을 냈다.
몇 해 전 연예인 박수홍씨가 친형에게 방송 출연료 수십억 원을 정산 못 받았다며 고소하자, 사기나 횡령 등 범죄는 친족상도례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박수홍법'이라는 이름으로 발의된 바 있다. '혈연' 가족이라는 '절대적 관계'는 한국 사회에서 조금씩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