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일부터 2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전북 진안 김용만 시인 집에서 진행된 일과시 동인 모임. 왼쪽부터 송경동, 김용만, 김해화, 오진엽, 조호진, 서정홍, 이한주 시인.
김해화
1990년대 초였을 것이다. '일과시' 동인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시국 농성장을 방문했다가 크게 실망했다. 붉은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두 팔을 하늘로 뻗으면서 노동해방을 외치며 철의 노동자를 부르던 노동자 시인들의 눈에 어영부영 농성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작가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그때, '일과시' 동인들은 문학이란 허울 아래서 노동하지 않는 자들, 룸펜처럼 기생하며 사는 자들, 노동을 폄훼하는 쁘띠부르주아지들과 어울리지 말자면서 발길을 돌렸다.
'일과시'는 1993년 제1집 <햇살은 누구에게나 따스히 내리지 않았다>(과학과사상)를 펴내면서 출발했다. 세상을 등진 동인도 있고, 암 투병 중인 동인도 있고, 여전히 공사판을 떠도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있고, 정년퇴직한 노동자도 있고, 자식들을 결혼시킨 동인은 여럿이고, 손자를 본 할아버지들도 여럿 있으니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14년 펴낸 일과시 20년 맞이 기념 시집 <못난 시인>(실천문학사)이란 제목처럼 누구 하나 잘난 체를 하지 않아서인지 30년 넘도록 동인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험한 세상을 어질게 살아온 동인들은 서울, 수원, 용인, 구례, 임실, 합천 등지에 흩어져 살다가 때가 되면 모여 돋보기 너머로 시를 읽고 품평하면서 착하게 술잔을 기울인다.
동인이라고 하면서도
5년 만에 한 번
3년 만에 또 한 번
겨우 모이면서
30년 이어졌으면
친목 모임인가 싶은데
자식 결혼식에도 부르지 않으니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는 것도 아닌데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일과시 3-완주 소양, 2023' 일부분)
이한주 시인은 1995년에 펴낸 동인지 제2집 <아득한 밥의 쓰라림>(지평)부터 참여했다. 물갈이가 되지 않은 탓에 2024년 올해로 쉰아홉인 이한주 시인이 막내뻘이다. 30년 넘은 '일과시'가 펴낸 동인지는 지난 2018년에 펴낸 제9집 <고공은 따로 있지 않다>(푸른사상)가 마지막이다. 문학 생산성이 극히 저조한 '일과시'가 30년 넘도록 해산하지 않은 연유는 무엇일까.
'일과시'가 깨지지 않은 가장 큰 연유는 '청피노조' 문학반 강사 출신인 이한주 시인 때문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이 시인은 실무 간사처럼 연락부터 시작해서 원고를 모아서 복사하고, 배포하고, 모임에서 먹을 술과 음식 등의 시장보기 등 궂은일을 불평 한마디 없이 해낸다. '일과시'에 착하고 성실한 이 시인이 없었다면 아무도 나서지 않으므로 아무도 모르게 고사(枯死)하는 나무처럼 조용히 해체됐을지도 모른다.
2023년 모임은 전북 완주에서 암 투병 중인 김용만 시인의 시골집에서 이뤄졌다. 이 모임이 성사된 것 또한 성실하고 예의 바른 이한주 시인의 수고 덕분이다. 이 시인의 시처럼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는 것도 아닌" 일과시가 30년 세월 동안 깨지지 않은 또 다른 배경은 동인들의 선한 품성 때문일 것이다.
김명환 동인은 여전히 어리숙하고, '미당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것조차 거부했던 거리의 시인 송경동 동인은 여전히 겸손하고, 지난 2023년 출간한 동시집 <골목길 붕어빵>(상추쌈)으로 제15회 권정생문학상을 수상한 서정홍 동인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게 됐어요. 어찌 살아야 권정생 선생님 이름을 그대로 지킬 수 있을까요? 걱정이 태산 같다"는 소감을 밝혔고, 암 투병을 하면서 KBS 다큐 <자연의 철학자들>에 출연하고,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삶창)를 펴내면서 언론 등에서 주목받고 있는 김용만 동인은 돌담을 작품처럼 쌓고 꽃과 식물을 소담스레 키우며 산다. 이 정도면 자랑하고 잘난 체해도 되겠건만 일체 잘난 체하지 않는다.
내 시가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다
서른 살 그 나이가 아닌데
이제 고쳐서 더 잘 쓸 자신도 없는데
일도 시도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밤늦도록 허리 꼿꼿한
노동의 새벽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일과시 3-완주 소양' 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