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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생명력 상소제도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7] 언로의 가치와 필요성을 요구한 상소의 예

등록 2024.08.13 14:21수정 2024.09.1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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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용암서원 앞에는 1555년 조선 명종이 내린 단성현감직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을묘사직소)가 새겨져 있다.

용암서원 앞에는 1555년 조선 명종이 내린 단성현감직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을묘사직소)가 새겨져 있다. ⓒ 김종신


1545년 중종이 재위 39년 만에 죽고 인종이 즉위했다가 그도 곧 사망하고 7월에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왕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섭정이 되어 나랏일을 오로지하였다. 그리고 8월에 사화를 일으켰다.

남명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높이고 조정은 물론 유생과 산림들에게 큰 충격을 불러일으킨 <단성소>가 나오기 전의 정치상황을 살펴보자.

중종은 3명의 왕비를 두었다. 첫 왕비인 단경왕후는 중종 즉위 후 폐출되었고, 두 번째 비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죽었다. 세 번째 비는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나중에 명종)을 낳았다. 그런데 경원대군의 외삼촌인 윤원로·원형 형제가 세자(나중의 인종)를 폐세자시키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면서, 세자의 외삼촌인 윤임과 대립했다. 이에 윤임의 무리를 대윤, 윤원형 형제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파가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정권은 소윤파에게 넘어갔다. 곧 이어서 윤원형이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모략함으로써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이어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까지 처형하는 등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을사사화 이래 몇 년 동안 처형당한 사람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윤원형 일파는 역모를 수습했다는 명목으로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도 관직을 빼앗기고 시골로 쫓겨나 죽었다. (주석 1)

a  명종이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하자 남명이 단호하게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국역 비.

명종이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하자 남명이 단호하게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국역 비. ⓒ 김종신


명종은 허수아비이고 왕대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 조정이 난도질되었다. 윤씨 일가가 조정의 요직을 꿰차고 반대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하였다. 이렇게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국정이 소언할 때 명종은 남명에게 단성현감으로 발령했다. 땅에 떨어진 왕족의 권위를 고명한 산림처사의 권위를 빌어 세척하려는 얕은 꼼수였다.

조선왕조는 절대군주체제였다. 숱한 외우내환을 겪으면서도 단일 왕조가 500년을 유지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는 일이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는 체제 내에 숨통을 틔워주었다는 점이다. 왕권이나 지배층의 전횡을 억제토록 하는 언관과 사관을 제도화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말대로 "상소를 통해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치 않고 할 말을 하는" 선비들의 기개가 있어서 무모하고 부패한 권력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다. 언관과 사관 외에 대궐 앞에 설치한 신문고, 성균관 유생들의 국왕이나 대신들을 비판하는 유소(儒疏), 당상관 이상이지만 임금을 만나 직소하는 입대(入對) 등이 있었다.

대표적인 언로는 역시 상소이다. 상소의 순기능은 조정의 정책결정 과정에 직접 참가할 수 없는 사람이나 일반 백성에까지 의사전달의 기회를 보장해 줌으로써 언로의 범위를 그만큼 확대시키고 민의의 투입기능을 넓힌 것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상소는 승정원에 직접 제출하는 직정제(直呈制)와 지방관을 통하는 종현도상소(從縣道上疏)의 전달방법이 있고 제출된 상소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접수의 의무, 임금은 접수된 상소의 결과를 반드시 회시할 책임이 있었다.

상소라고 하여 모두 문서로써 하는 것은 아니다. 상소를 통신방법으로 나누면 봉사(封事), 의(議), 서계(書啓), 장계(狀啓) 등 문서로 하는 것과 계언(啓言), 진언(秦言) 등 구두에 의한 방법, 복합(伏閤), 권당(捲堂) 등 직소에 의한 방법 등이 있다. 특히 봉사는 중간에 개봉할 수 없는 국왕 친전의 상소로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었다.

물론 5백년 왕조 동안에 이러한 언로가 모두 완벽하게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세조, 연산, 광해 등 왕권의 전제가 심할 때는 언로가 좁아지거나 막히고, 세종, 영조, 정조 등 선정이 이루어질 때는 언로가 넓어졌고 또 활발했다.

돌이켜보면, 조선조의 선비(士林)들은 바른 언로를 얻기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전개했다. 희생을 각오하고, 삼족의 멸살이라는 무거운 위험을 안으면서 언로대개(言路大開)를 위해 노력했다.

a 뇌룡정(雷龍亭) 남명 선생이 48세 때부터 12년간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 뇌룡이란 장자(莊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온 말. 선생은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고 함.

뇌룡정(雷龍亭) 남명 선생이 48세 때부터 12년간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 뇌룡이란 장자(莊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온 말. 선생은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고 함. ⓒ 김진수


먼저 언로의 가치와 필요성을 요구한 상소의 예를 찾아보기로 하자.

우정규(禹禎圭)는 <경제야언>에서 "언로를 넓혀 군중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고 언로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지전설을 주장한 바 있는 홍대용(洪大容)은 <임하경륜>에서 "어떤 신분임을 막론하고 공적인 발언권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이·예(吏·隸)에 이르기까지, 가까이는 국왕 측근의 환관으로부터 멀리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맡은 직책에 따라 마음에 품은 바를 반드시 펴도록 해야 한다고, 언로의 일반화를 요구했다.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내걸고 혁신정치를 도모하다가 38살의 젊은 나이에 사화의 희생물이 된 조광조는 "언로의 통색(通塞)이 국가에 가장 긴요하다. 언로가 통하면 치안(治安)하지만, 막히면 난망한다. 인군은 모름지기 언로를 넓히는 데 힘써 공정백사로부터 사정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사간원 <청파양사계(請罷兩司啓)>에서 역설했다.

율곡은 "언로가 열리고 닫히는 데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 공론이란 유국(有國)의 원기이다.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나, 만약 위 아래 모두 공론이 없다면 그런 나라는 망하고 만다"고 <대백참찬소(代白參贊疏)>에서 요구, "장사하는 사람이나 나그네나 누구 할 것 없이, 오히려 도로(길)에서도 의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론, 즉 공론을 상려하는 사이에서까지 구해야 한다"고 언로의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주석 2)


주석
1> 하일식,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을사사화>, 145쪽, 일빛, 1997.
2> 김삼웅 <한국의 언로사상>, <한국민주사상의 탐구>, 100~101쪽, 일월서각, 1985.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조식평전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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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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