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산천재에서 바라 본 눈내린 지리산 천왕봉
김수종
남명이 초야에서 고고하게 살아갈 때 수 차례에 걸쳐 지인들이 조정에 천거하였다. 지리산에 칩거하기 훨씬 전인 1540년(중종 35년) 조정에서 전국의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이 내렸다. 이에 따라 병조참지 이임이 남명을 천거하였다.
또 경상도관찰사 이몽량이 남명을 천거하면서 전생서주부, 사도사주부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관은 남명에 대해 "조식은 사람됨이 맑고 절개가 곧아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고 영욕·이달로써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존행이 뛰어나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주석 1)라고 평했다.
1553년(명종 8)에는 남명을 예빈시주부에 임명하였다. 이때 사관은 남명에 대해 "천성이 강개하고 정직하여 세상 따라 부앙하려 하지 않았고, 몸을 깨끗하게 가져 속된 사람과 말할 때는 자신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며 뒤로 돌아보지 않고 떠났으며 국가에서 누차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주석 2)
조정의 신료들 뿐만 아니었다. 관찰사나 감사가 되어 부임하면 으레 남명은 찾아왔다.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더러는 그의 남다른 행적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당시 감사로 부임하는 사람들이 임지에 도착해서 대개 남명을 찾아 인사를 드렸던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이양원이 경상도의 관찰사가 되어 남명을 방문하였다. 남명은 주지하다시피 성성자라는 방울을 치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칼을 차고 다녔다. 이양원은 남명이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곧 칼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칼이 무겁지 않습니까?" 하였다.
무엇 때문에 이같이 쓸데없는 일을 하는가 하고 은근히 조롱하는 뜻이 담겨있는 말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 남명은, "무엇이 무거우리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상공의 허리 아래 금대(金帶)가 무거울 것 같소"라고 뼈 있는 말을 하였다. (주석 3)
그는 소인배들을 경멸했다. 특히 높은 권좌를 차지한 소인배와는 만남 자체를 싫어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영의정이 된 이기(李芑)가 남명에게 만나자는 서한을 보내왔다. 세간에서는 윤원형과 이기를 이흉(二凶)이라 불렀지만 권력서열 2인자의 면담 요청에 남명은 냉담한 답변을 보냈다.
상공께서는 제가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산림에 들어갔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혹시라도 제가 학업을 쌓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많은 것을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에는 병이 많아서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거처하면서 다만 여생을 보전하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의리에 대한 학문은 제가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주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