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종성 평전능히 수만의 군사를 기르기에 넉넉한 산 정상의 드넓은 평전. 김개남은 재봉기를 도모하려 이곳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영천
'남녘에 새 세상을 열겠다(開南)'는 웅지를 품었던 김개남도, 이곳을 근거지 삼아 권토중래를 꿈꿨을 가능성이 있다. 전라도의 지형과 지세에 상당한 지식이 있던 전봉준도 이에 동의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래서 쉽게 종성리로 길을 잡았을 수 있다. 전봉준도 이곳으로 오던 길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었던 친구에게 배반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신의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의 차이였을까, 혹 벼슬자리가 탐났을까, 그도 아니라면 역적으로 몰린 친구를 보호해 주었다는 명목으로 후한을 두려워한 옹졸함의 발로였을까?
친구이기 전에
청주에서 패배한 김개남은 진잠과 연산 쪽으로 내려와, 고향 지금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종성리로 스며든다. 우선 매형에게 의탁하기 안성맞춤이다. 떠도는 이야기로 임병찬이 "자네가 있는 곳보다 이곳이 더 안전할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게"라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옥구 출신으로 김개남보다 두 살 많은 임병찬(1851년생)은 아전 출신이다. 1867년 옥구 형방(刑房)이 그의 첫 벼슬이다. 이후 여러 관청에서 공훈을 세우며 승승장구한다. 26년간의 관리 생활을 접고, 1893년 종성리를 터전으로 삼는다.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을 그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지, 이후 그의 행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도 훗날 목숨을 걸고 항일에 나섰고 죽음마저 김개남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1894년 겨울, 그때는 달랐다.
을사늑약 후인 1906년 2월 최익현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군사를 맡아 곳곳 관아를 습격, 곡식과 무기를 탈취해 종성리 평전에서 훈련한다. 그해 6월 8백여 군사로 순창에서 전투하다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2년 형을 선고받고 최익현과 대마도로 유배당한다. 1907년 1월 임병찬은 귀국하나,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