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의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바라 본 태평양의 모습.
이율
얼마 전, 우연히 북한 주민을 인터뷰 한 외국 매체의 방송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을 말하자면, 기자가 "당신이 평생 딱 한 곳만 가볼 수 있다면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싶나요?"라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 주민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우리 인민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쯤은 세계 최강 미국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은 만국 공통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그랬다. 그래서 지난 5월,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버킷리스트의 달성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우호국인 우리나라 국민들은 미국을 여행할 때에 비자(VISA)를 받을 필요가 없이 비자면제 프로그램(ESTA)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말만 면제이지, 2시간 가량 컴퓨터 앞에서 호구 조사를 거쳐야 하고, 통과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 무비자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간혹 입국이 거절된 사례들도 계속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추방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입국 심사 예상 질문과 그에 적절한 답변을 영어로 출력해 달달 외웠다. 또 현찰 없이 카드만 들고 가면 불법체류 의도가 있다고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분실의 위험이 있지만 1,500달러를 환전하여 현금으로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저렴한 비행 편을 택하느라 어쩔 수 없이 직항이 아닌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서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하는 여정을 택했다. 경유지인 밴쿠버에서 환승을 위해 서둘러 탑승구로 갔다. 기내에서 다시 한번 입국심사 연습을 하려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LA가 아닌 캐나다 밴쿠버에서 뜬금없이 그 악명 높은 미국 입국심사를 받게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젠장... 도대체 왜 미국 입국 심사를 캐나다에서 하는 거지?'
중년의 백인 남성인 입국 심사관은 내게 "며칠 동안 체류할 것인지?", "얼마를 소지하고 있는가?"와 같은 뻔한 것들을 물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미리 공부를 하고 갔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예상 외로 일이 술술 풀리니 만족스러워 미소가 절로 머금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심사관은 내 손을 가리키며 쥐고 있던 종이를 달라고 했다. 입국 심사를 대비하기 위해 미리 작성해 간 예상 문답지였다.
'이걸 왜 달라고 하지... 미리 준비한 답변이라고 진정성을 의심하면 어떡하나.' 입국이 불허 될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사내의 단호한 표정에 다소 겁을 먹기는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종이를 건넸다. 그런데 나는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타입이라 심사관이 오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저 망했다며 단념하기 시작했다.
심사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를 응시했다.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느새 180도였던 눈썹의 각도는 45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항공권과 호텔에 큰돈을 지출했는데 모두 공중분해될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호탕한 웃음이 들려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내게 어디를 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순진한 표정으로 디즈니랜드 예매권을 보여주었다. 불법 체류의 의도가 있는 사람은 보통 값비싼 관광지를 예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그는 행운을 빈다며 나를 풀어 주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자기 입장에서는 별것도 아닌 입국 심사를 위해 내가 공부를 했다는 사실에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