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대왕실록>에는 인조의 실정에 관한 비판이 꽤 실려있다. 이덕일은 <조선 왕 독살사건>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같은 책에서 정조와 소현세자의 죽음을 의문사로 보았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다산초당
세 살배기 최연소 유배객 "뱀이 제일 무섭다"
열 살이던 석철은 과연 이듬해 9월 병에 걸려 죽고, 둘째 석린도 석 달 뒤 형의 뒤를 따라간다. 세 살배기로 귀양 온 막내 석견은 최연소 제주도 유배자였는데 그의 눈에
비친 제주 생활은 어땠을까? 그가 남긴 글 중에는 '제일 겁나는 게 뱀'이라고 쓴 구절이 있다. 그는 나중에 귀양에서 풀려나 경안군으로 복권되고 두 아들을 두었지만 몸도 마음도 상했는지 스물두 살에 죽는다.
그러나 경안군의 아들 임창군 형제도, 소현세자 대신 왕이 된 봉림대군, 곧 작은할아버지 효종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된다. 강화도에서 '임창군이 왕실 종통이며 보위에 올려야 한다'는 의문의 '흉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임창군의 아들 밀풍군은 이인좌의 난 때 자기 뜻과 무관하게 왕으로 추대됐는데, 영조가 자진할 것을 명령해 목숨을 잃는다. 4대에 걸쳐 비극이 이어진 것이다. 정통성이 있는 이가 왕위 계승에서 한번 밀려나면 그 가계가 정통성이 부족한 왕들에게 어떤 박해를 당하는지 이보다 더 잘 말해주는 궁중 비극이 있을까?
개혁도 종교자유도 철저히 억누른 정순왕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정약용 등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고 천주교에도 관대했다. 그러나 정조가 석연치 않게 병세가 악화해 급서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된다.
조선 최초 신자이던 이승훈과 황사영 등 천주교도들이 꿈꾼 세상은 신분과 남녀
차별이 없는 사회였지만 노론 기득권 세력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사학'(邪學)이었다. 개혁 사상가였던 정약용마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는 몰라도, 국문장에서 자신은 천주교를 배교(背敎)했다면서 황사영과 이승훈을 고변한다.
"황사영은 제 조카사위이지만 원수입니다. 그자는 죽어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백다록'은 이승훈입니다.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걸 즐거워했습니다."
정약용은 이승훈의 처남이었는데 다른 처남인 정약종은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을 살리려고 그들이 배교했다는 문서를 의금부에 바친 뒤 순교한다. 정약용은 이가환 등과 더불어 노론 기득권 세력이 꼭 제거하고 싶은 정적이었다. 노론 벽파 홍낙안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사상가 정약용에게 느낀 이율배반의 연민
천주교를 빌미로 정약용을 죽이려 했지만 연루가 약해 성사시키지 못하고 정약종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죽이는 데 그친다. 정약종을 굳이 죽인 것은 한 집안에서 대역죄인이 나오면 자손들까지 벼슬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폐족'이 된 셈이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를 저술 기회로 삼아 조선시대 최다 역작들을 남겼다. 나는 실직 상태에 있던 2000년 다산초당을 찾아가서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적이 있다.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과 불법 증여 문제 등을 줄기차게 비판하다가 <한겨레> 경영진도 부담스러워하자 사표를 던진 것이다. 정약용이나 역사학자들이 쓴 책들을 읽으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졌는데, 나중에 그가 이승훈과 황사영을 고변한 사실을 알고 나서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을 배론성지로 데려간 이유
제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재직할 때 황사영이 토굴에 숨어살면서 '백서'를
쓴 배론성지에 신입생들을 데려 간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글쓰기의 치열함이 어떤 건지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도 무려 1만3311자를 아주 가는 붓으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