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아니 보았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오늘의 독립운동가 29] 10월 7일 타계한 조성환 지사

등록 2024.10.07 11:19수정 2024.10.0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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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성환 지사, 그가 모셔져 있는 효창공원 의열사

조성환 지사, 그가 모셔져 있는 효창공원 의열사 ⓒ 국가보훈부


1948년 10월 7일 조성환(曺成煥)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875년 7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73세였다. 조 지사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상은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의열사'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의열사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 255(효창공원)에 있는 사당으로, 1990년 11월 1일 건립되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순국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와 중국에서 순국한 이동녕·차리석의 유해와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 그리고 국내에서 서거한 조성환 · 김구 등 7명의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모신 효창공원 묘역이 조성되었다.

1990년 11월 1일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는 7명의 순국선열의 영정을 모신 합동 사당인 의열사를 건립하였다. 1993년 이래 매년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3일에 7위 합동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보훈부

조성환 지사는 1907년 안창호, 이갑, 이동녕, 김구, 전덕기, 이승훈, 안태국, 노백린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면서 구국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에 망명해 있던 1912년 시찰차 만주에 온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 거사를 추진하던 중 피체되어 1년 동안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당사자 암살 시도

가쓰라 다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당사자로, 우리나라에 큰 해악을 끼친 일본 정치가이다. 가쓰라는 1905년 7월 29일 미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밀약을 맺었는데,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를 서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밀약에 힘입어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즉 조성환 지사의 가쓰라 암살 시도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과 성격이 같은 거사였다. 성공했으면 우리 민족의 위상과 의기를 국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미국 협조 덕분

조 지사는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39명 민족대표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을 발표했다. 1919년 2월 동경 유학생 선언과 3월 서울 선언보다 앞선 '독립 선포'였다. 당시 그는 러시아 영토 니콜리스크에서 유동열 등과 무력투쟁을 계획 중이었다.


1919년 3월 하순,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김동삼, 조영진, 조소앙 등 30여 명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상해로 왔다. 곧 출범할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4월 10일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개최된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노령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차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무력 투쟁 노선을 견지해 다시 만주로

그는 본래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인식은 결국 그를 다시 만주에서 활동하게 이끌었다. 그래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참모장을 맡았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 대승을 거둔 북로군정서 및 대한독립군, 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10개 독립운동단체들은 그 직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다. 서일이 총재, 조성환, 홍범도, 김좌진이 부총재에 선임되었다. 지휘부는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땅으로 들어갔다.

대한독립군단 부총재에 선임

그는 노령에서 이청천, 최진동, 오하묵, 홍범도, 안무, 김규식 등과 함께 고려의용대를 조직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혁명에 반대하는 러시아 반군 토벌작전에도 참가했다.

1921년 6월 공산당 파벌 투쟁과 러시아의 간섭으로 이른바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났다. 이때 무장해제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독립군이 죽임을 당했다. 그는 북경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외무위원을 맡아 중국정부와의 교섭활동을 담당했다.

자유시 참변을 겪고 다시 북경으로

1925년 3월 만주에서 김혁, 김좌진, 나중소 등과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외교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당시 신민부의 군세가 53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지휘부는 사관학교를 설립해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이범윤과 함께 고문을 맡아 교육 훈련을 지도하였다.

1925년 10월 임시정부가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대했다. 그는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탁, 김동삼, 오동진, 이유필, 김좌진 등과 함께 국무원( 현재의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취임하지 않고 줄곧 만주에 머무르면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통합을 호소

1926년 북경으로 가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촉성보(促成報)를 발행해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과 통합을 호소했다. 1927년 11월 14일 노력한 보람이 있어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대표연합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북경대표로 참석했고, 이윽고 한국독립당이 발족했다.

1931년 12월 24일 그는 윤기섭, 조소앙, 조완구 등과 경기도 의원에 다시 선출되었다. 그후 1932년 국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45년 광복을 이룰 때까지 군무부장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9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서 황학수, 이준식, 왕중량 등과 함께 군사 모집 등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했다.

임정 군무부장 등 맡아 광복군 창설 기틀 마련

1940년 5월 통합운동을 펼쳐 여러 정당으로 나뉘어 있던 분열상을 민족진영 연합정당 한국독립당 창립으로 통합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 운영 활성화에 기여했다. 그후 이윽고 독립을 맞아 귀국,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과 유도회 성균관 부총재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48년 10월 7일 서거했다.

1948년 10월이면 1950년 6월 동족상잔 전쟁 발발 약 20개월 전이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몸으로서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남은 삶을 오로지 나라를 반듯하게 만드는 데 쏟아 부었(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물사전)"지만 조국은 결국 분단되고 말았다.

철조망이 국토의 허리를 휘감은 현실 앞에서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통한의 아픔을 맛보았을까! 가쓰라 처단에 성공했으면 조국의 역사는 바뀌었을 텐데... 하는 회한에 빠지지는 않으셨을까? 전쟁을 몸소 겪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인가? 서거 76주기를 맞아 님의 명복을 빌며 '조성환 약전'을 정리해 본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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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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