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 불렀다가 몽둥이 80대 맞은 21세 여인

[오늘의 독립운동가 27] 10월 5일 타계한 이소열 지사

등록 2024.10.05 12:03수정 2024.10.0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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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북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112-2 '내 고장 해평 산양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제창 마을' 기념비와, 그 뒷면의 내용

경북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112-2 '내 고장 해평 산양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제창 마을' 기념비와, 그 뒷면의 내용 ⓒ 정만진


이소열(李小烈) 지사는 1968년 10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본적이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5번지인 지사는 1898년 8월 10일 출생했으니 향년 70세였다. 1919년 4월 3일 해평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일로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해평면 3.1운동은 산양리 예수교회 최재화 목사와 인동면 거주 기독교도 박진오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4월 3일 오후 11시 30분쯤 산양리·송곡리·금호리 마을 주민 50여 명과 함께 해평 주재소로 행진했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최재화 목사의 제수

21세 여인 이소열은 최 목사의 제수(弟嫂)였다. 그녀는 주민들과 함께 해평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경찰들이 아직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대검과 곤봉을 휘두르면서 무력으로 탄압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충돌이 가열되자 일본 경찰이 총을 쏘았다. 일반 민중 소수가 총격을 이길 수는 없다. 시위 참가자 55명 모두가 피체되었다. 이소열은 선산 경찰서로 끌려가 태(笞) 80도(度)를 받았다.

21세 여인이 묶인 채 엎드려 있고, 몽둥이로 80대를 두들겨 맞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3.1운동만으로도 "7천여 명 이상이 순국했다(국가보훈부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는 사실을 생각하면 '태 80도'는 가벼운 양형이지만, 그러나 너무나 비인간적 체형인 것도 분명하다. 일본제국주의의 악랄성에 다시 한번 치를 떤다.

엉뚱하게 소개한 '관련 현충시설 정보'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는, 이소열 지사 '관련 현충시설 정보'로 탑 1기와 비석 1기를 각각 소개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산14-81번지 소재 '3·1독립운동 기념탑', 그리고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선주로 127-4번지 소재 '선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이다.

a  서울 '3.1독립운동기념탑'(왼쪽), 경북 구미 '선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서울 '3.1독립운동기념탑'(왼쪽), 경북 구미 '선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 국가보훈부, 정만진

이소열 지사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을까 기대하면서 '3·1독립운동 기념탑' 소개문을 읽어본다. 이 기념탑은 1999년 3월 1일 건립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탄압하였지만, 애국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서에서 선언한 대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로 온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독립운동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며, 국제여론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이것이 일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즉각적인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출범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국가를 세울 기초를 놓았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의 경과와 의의가 간명하게 잘 요약되어 있다. 다만 이소열 지사와 직접 관련되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전국이 아니라 선산 지역 당시 상황을 언급했을 '선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는 그렇지 않으리라 기대하면서, 또 읽어본다.

일제강점기 활동한 선산 출신의 독립유공자로 권오환(1892~1957), 김관묵(1894~1967), 김의경(1898~1949), 이원길(1893~1920), 최재화(1892~1962)는 3·1독립운동으로, 황진박(1888~1942)은 의열 투쟁으로, 김영득(1908~1940), 이종식(1891~미상), 장재성(1914~1939)은 국내 항일로, 남상순(1926~1978), 육홍균(1900~1983)은 일본 방면 항일투쟁으로, 김종철(1924~), 전재덕(1924~)은 광복군에 참여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구미시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3년 10월 22일 이들 각각의 비를 세웠다.

이소열 지사가 없기는 서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이소열 지사의 형부인 최재화 목사는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를 찾아가 본다. 산양리는 1919년 4월 3일 당시 만세시위를 일으켰던 마을이다.

아! 마을 입구에 닿는데, '내 고장 해평 산양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제창 마을' 비석이 도로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건립되어 있다. 그 바로 뒤에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 목사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국가보훈부는 이소열 지사 '관련 현충시설 정보'로 이곳의 빗돌들을 소개했어야 마땅하다. 어째서 '선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와, 심지어 서울에 있는 '3·1독립운동 기념탑'을 거론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내 고장 해평 산양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제창 마을' 비의 뒷면 글을 읽어본다.

내 나라! 내 조국! 내 땅! 대한민국 찾으려고
목숨 걸고 외쳤던 대한독립만세
3천리 강산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네

기미년 4월 3일 우리 고장 산양마을 사람 모두는
한마음 한뜻 되어 태극기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 힘차게 외쳤다네

모질게도 서러웠던 그 세월 견뎌내고 지켜온
고귀하고 숭고한 나라사랑하는 마을정신
이 돌에 새겨 영원히 이어가리라

2017.8.15. 산양삼일동지회

순박한 문장이 결연한 내용과 어우러져 있어 더욱 눈물겹다. 꽁꽁 결박된 채 몽둥이 매를 80대나 두들겨 맞고 있는 21세 여인 이소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풀려난 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마을 앞 저 들판으로 돌아와 어제처럼 일하며 통곡했으리라. 지금 보이는 벼와 풀들처럼 저렇듯 푸르게 울었으리라.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이소열 #최재화 #산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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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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