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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이슬비·보슬비가 다 다르답니다, 이렇게

한글날 맞아 다시 읽는,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

등록 2024.10.09 19:21수정 2024.10.0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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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장례식장'이 뭐야?" - "음….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잘 가라고 인사하는 곳이야."
"'모레'는 언제야?" - "내일 지나 다음 날이야."
"'윤슬'이 뭔데?" - "햇볕이 강이나 바다를 비춰서, 반짝이는 걸 말해."
"'사망'은 또 뭐야?" -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야."

아이와 손잡고 걷는 길 위에서, 돌부리에 걸리 듯이 아이 질문에 자주 멈춰 선다. 한창 한글을 읽고 쓰는 일곱 살, 아이는 눈과 귀에 걸리는 세상 모든 단어에 질문을 던진다. 어른에게 익숙하고 일상적인 세상이 아이에게는 호기심 덩어리다.


부모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머리를 굴려 아이가 듣고 이해하기 쉬운 낱말과 문장을 골라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해준다. 도저히 쉽게 설명할 길이 없으면, 사전을 찾는다. 아이 덕분에 익숙한 단어도 풍경도, 가끔 처음 만난 듯 낯설게 다가온다.

작가에게도 어려운 한글... 아이는 자꾸만 내게 묻는다

내 직업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쓰는 작가다. 글 쓸 때면 항상 국어사전을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띄워둔다. 이 단어 저 단어를 찾다 보면, 정확한 뜻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게다가 우리말은 어찌 그리도 비슷한 낱말이 많은지. 비만 하더라도 보슬비, 가랑비, 여우비, 실비 등이 있고 바람에는 하늬바람, 높새바람 등등 종류도 여러 가지다.

매일 공부해도 모자라고 형편없는 것만 같은 나의 어휘력, 미디어 기기 사용으로 자꾸만 떨어진다는 요즘 아이들 문해력. 모자람을 채우고 아이의 문해력이 떨어지는 걸 막고자 일주일에 한 번은 집 근처 도서관에 꼭 들르곤 했다.

a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 표지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 표지 ⓒ 김예린


그러다 도서관에서 사전 한 권을 발견했다.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 책 표지만 보고 냉큼 품에 안았다. 끊임없이 쏟아내는 아이의 질문에 좀 더 명쾌한 답을 주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비슷한 단어를 묶은 책이겠거니'하고 펼친 책은 머리말부터 마음을 댕~하고 울렸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이나 손전화로 손쉽게 낱말 찾기를 해볼 수 있습니다. 종이책으로 묶는 사전은 어느 모로 본다면 바보스러운 짓이 될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종이책 한국말사전을 내놓으려고 할까요? 왜냐하면, 말을 말답도록 깊고 넓게 헤아리면서 생각을 가다듬도록 돕는 길동무로 읽는 책'을 엮고 싶기 때문입니다.' (p.4)

지은이 최종규 작가는 낱말을 찾는 일이 의사소통을 위해 말뜻을 살피는 걸로 끝날 때,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새로운 생각=새로운 사랑이라는 글쓴이

이야기가 태어나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데, 으레 그러하듯 기존의 인터넷 사전 검색만으로는 그 일이 힘들 거로 생각했다. 작가는 '새 생각이 사랑으로 흐른다' 했다. 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 문장에 펜으로 줄을 쳤다.

'스스로 생각을 하는 동안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생각을 지어서 살자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살고, 살면서 살림 짓는 사이에 삶이 태어납니다. 삶이 태어난 자리에는 서로 아끼거나 돌보는 사랑이 태어나요.' (p. 5)

사전의 낱말을 찾는 일로 사랑이 태어난다고 말하는 작가의 생각, 읽다 보면 그건 너무 확장된 생각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 속에 단어의 뜻을 정성스럽게 정리해 둔 걸 보면, 그걸 찬찬히 읽다보면 예전에 알고 있던 단어도 새롭게 다시금 뜯어보는 눈이 생겼다. 그리고 지은이의 말처럼 새로운 생각이 절로 지어졌다.

'아, 이 책은 소장해야겠다.'

책 머리말을 다 읽고, 결국 책을 새로 주문했다. 2016년 출판된, 비교적 오래된 책이지만 요즘 비슷한 우리말 뜻이 헛갈릴 때, 익숙한 단어의 뜻을 뜯어볼 때마다 빛을 내는 책이다. 책을 읽다가 '가랑비, 보슬비, 실비' 단어 뜻풀이에 줄을 그었다.

"가늘게 내리는 비"라서 '가랑비'입니다. 가랑비보다 더 가늘게 내리는 비는 '이슬비'라고 해요. 똑같이 가늘게 내리는 비이지만, 바람이 없는 날 드문드문 조용히 내리는 비는 '보슬비'입니다. '실비'는 "실처럼 내리는 비"예요. (p.17)

a  가랑비, 보슬비, 실비의 차이를 꼼꼼히 설명해뒀다.

가랑비, 보슬비, 실비의 차이를 꼼꼼히 설명해뒀다. ⓒ 김예린


며칠 전 가을비 내리던 날, 나는 우산 위로 톡톡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해 봤다. '이 비는 가랑비일까, 이슬비일까? 아니면 보슬비일까?'

비를 심오하게 탐구하는 사이, 구름이 우중충하게 들여진 오늘이 새로 보이고, 지금 순간을 사랑하게 됐다.

비슷한 단어들을 알뜰살뜰 사려 깊게 살핀 책 덕분에 내 마음과 내 시선도 한층 깊고 촘촘해졌다.

a  우산 위로 톡톡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 비가 어떤 비인지 생각해 봤다. 비슷한 단어들을 알뜰살뜰 사려 깊게 살핀 책 덕분에 내 마음과 내 시선도 한층 깊고 촘촘해졌다.(자료사진)

우산 위로 톡톡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 비가 어떤 비인지 생각해 봤다. 비슷한 단어들을 알뜰살뜰 사려 깊게 살핀 책 덕분에 내 마음과 내 시선도 한층 깊고 촘촘해졌다.(자료사진) ⓒ noahsilliman on Unsplash


오늘도 아이의 끊이지 않는 질문에 답하다 말문이 막혀, 오랜만에 책장 속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의 '일러두기'에 지은이의 당부가 보였다.

"이 사전을 '가끔 들추려고 책상 맡에 놓'기보다는 '말을 새롭게 익혀서 생각을 새롭게 북돋우는 슬기를 가꾸'려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읽어 주시면 더없이 고맙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비슷한 단어를 살뜰히 살펴봤다. 책에 적힌 저자의 맺음말처럼 넉넉해진 '글꽃' 덕분에 슬기로움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a  책 속 일러두기

책 속 일러두기 ⓒ 김예린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비슷한 단어의 뜻을 맞추는 게임도 했다. '좋아하다', '사랑하다'의 차이를 아이와 함께 알아갔다. 알뜰살뜰 구분해 둔 비슷한 말들 꾸러미 덕에, 내 풍부해진 답변 덕분에 아이가 입 밖으로 내는 단어들도 더 다채로워졌다.

오후 8시 TV 뉴스 진행자가 요즘 아이들의 떨어지는 문해력을 걱정하며, 제578돌 한글날 행사를 알린다. 책 지은이의 '일러두기' 당부를 다시 꼭꼭 씹으며, 식탁 위 책을 올려뒀다. 식탁 위 책을 보며,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의 식탁 위 올려지길 바랐다.

집안을 오가며 하루 한 장 책장이 넘겨지는 사이 새로운 생각이 피어나고, 삶을 더 사랑하길 바라며 기쁘게 한글날을 맞이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우리말 #한글날 #비슷한말 #우리말사전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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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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