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 중인 작품채식주의자(2024)와 낙원(2021)
황융하
한국어는 시적이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러한 감정은 단어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며, 그 배경에는 한국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이 깔려 있다. AI가 집필하는 시대에도 한글은 단순한 단어의 조합 이상을 요구한다. AI는 이 '깊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문학에서 중요한 건 표면의 의미가 아니라, 이면에 숨겨진 감정과 여백, 독자의 상상력을 도발하는 공간이다. 이는 AI가 쉽게 구현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인간 작가의 창조적 역할이 빛나는 이유다.
반면, 영어는 구조적으로 더 단순하고 규칙적이어서 AI가 다루기 쉬운 언어로 평가된다. 영어의 직관적 문법과 규칙성은 AI가 문장을 조립하는 데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영어는 AI가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문학적 차별화가 어렵다는 폐단도 존재한다. AI가 생산하는 영어 문장은 정확하지만, 그 안에 담겨야 할 감정과 인간적인 온기는 부유하는 게 아닐지.
한강이 비서구권 그리고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이번 수상의 의의는 더욱 크다. 서구 중심의 문학 담론에서 비서구권 작가가 주목받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이제는 세계 문학의 지형도가 다양화되었음을 의미하며, 한국 문학 역시 이 흐름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또한 여성 작가로서 한강의 상징성은,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내면을 깊이 탐구한 점에서 중요하다. 그녀의 작품은 현대 여성들의 내적 갈등과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며, 이를 세계 문학의 주류로 끌어올리는 데 톡톡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강의 수상은 여성 작가들이 세계 문학 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을 한층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당연한 영예를 넘어, 한국 문학의 깊고 어두운 심연을 세계에 드러낸 사건이다. <소년이 온다>는 피로 물든 광주 거리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상처와 잊히지 않는 기억의 무게를 담아낸다. 쓰러진 나무가 땅속의 뿌리를 부여잡으며 다시 일어서려는 생명력은 지금도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흰>에서는 죽음과 상실이 눈처럼 쌓여가는 풍경에서 인간 존재는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덧없으나, 생의 무게를 견디는 작은 빛을 품고 있다.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항쟁의 비극 속에서 잊힌 영혼들과 그들이 남긴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서로 얽혀 있는 세상을 묘사하며, 이별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드러낸다. 한강의 글은 고통과 상실을 시어로 엮어낸 듯,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파고든다. 그녀의 문장은 날카로운 칼처럼 아픔을 드러내면서도, 그 위에 내려앉는 눈 부신 빛처럼 치유와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