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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학연구소
살림경제의 바탕, 마을공동체라는 관계망:두레, 오산마을 사례
자본의 무한증식 경제가 대두된 시기는 짧게는 100년, 길게는 약 300년 전이다. 그전까지 경제는 경세제민, 즉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였다. 경제라는 말뜻에 원래 자본을 증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살림경제'에 가깝다.
원 살림꾼은 무한증식 경제논리와 다른 질서로 살아온 이들의 삶에서 지혜를 길어 올려 대안을 모색해 볼 수 있다 했다. 자본주의 근대화로 인해 붕괴되기 이전의 마을 모습인 조선후기 두레와, 일제강점기 오산마을 사례를 예로 들며 살림경제 질서로 살아온 이들이 역사 속에 있었음을 밝혔다.
두레는 조선후기 농촌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경제적 조직이다. 두레는 개별 농민의 필요를 채우고 공동체 단위의 살림경제구조를 만들었다. 개인 소유지와 마을 공유지를 두레가 공동으로 운영했고 이를 통해 거둔 소산을 공동으로 분배하기도 했다. 마을에 농사짓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의 농사를 거들고, 마을 전체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함께했다. 두레는 공동체적 가치를 생성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경제적 토대 역할을 했다.
1930년대 대표적인 협동조합 지역사회로 꼽히는 오산마을은 조선말 신민회운동에 기반한 이상촌 마을이 토대였다. 마을에서 학교와 조합은 마을을 교육과 산업으로 구조화시키고 정신과 물질이라는 양면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조합은 주민들의 호혜적 경제관계를 구체화한 양식이었다.
원 살림꾼은 두레와 오산마을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적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민의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했던 이들이 마을공동체에 기반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과정에서 살림경제적 관계가 출현했다는 점이라 했다. 그들에겐 대안적 경제제도가 이론적으로 모색한 산물이 아니었다.
"두레는 매일 만나 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 일상의 의례와 행사, 공동노역을 하며 살아온 관계였어요. 객관적이고 합리적 논리라든가 제도로서 이 땅에 뿌리내렸던 것이 아니라, 그저 눈만 보고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다정하고 끈끈한 인간관계가 바탕이었던 거죠. 오산마을의 학교와 조합이라는 두 축을 가능하게 한 것도 강한 공동체적 관계성을 지닌 마을이었어요. 남강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설립하면서 학교, 마을에 가족, 문중을 이주시켜 새로운 마을문화를 일으키고자 했어요. 이 뜻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이주했고 이렇게 모인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적 훈련을 받았고 학생과 주민들은 한 마을에서 차별 없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았어요."
또 두레와 오산마을이 쇠퇴한 과정을 통해 살림경제라는 실천을 일으키고 지속하는 힘은 국가나 자본이 아닌 마을공동체적 관계망에서 온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제도적 형태에 대안적 실천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나 두레, 협동조합의 근본적인 힘은 민이 국가나 자본이 아닌 마을공동체적 관계망에 의존해 자기 생존과 필요를 해결해 가는 데 있었어요. 일제강점기 오랜 세월 공동체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마을공동체를 행정적으로 통폐합하여 와해시키고 관 중심의 마을 단체를 조직하면서 마을의 자주성이 약화돼요. 이 흐름 속에서 두레도 점점 힘을 잃게 돼요. 오산학교는 1930년대 중반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면서 학교 규모를 키우고 제도권 교육기관으로 변하게 돼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물질적 토대는 더 나아진 듯 보였어도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성은 약화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