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젊은 여성노동자의 잦은 이직은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5-1] 한 줌만큼의 휴식을 위한 두 줌만큼의 수고

등록 2024.11.05 09:21수정 2024.11.0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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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시를 쓰기에 불리한 시대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은 이대 근처의 달동네였다. 많은 집이 담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보통 한 가정에 여러 자녀가 있었고 남자 가장들은 막노동이나 근처 아현시장에서 장사했는데 그 외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여자들은 가사와 임신·출산을 반복하느라 거의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동네 아이들은 보통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공장에 취업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던 나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늘 압박감과 불편함을 주는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첫 담임은 평소에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학교에 자주 드나드는 학부모를 둔 아이들을 편애하고, 나에겐 은근히 무시가 깔린 태도로 대했다. 어린 나이에 불공정한 세상을 그렇게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봄소풍을 갈 때까지 부모님은 육성회비를 한 달 치도 못 내주셨다. 어머니는 소풍을 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내 소풍인데 어머니가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자세한 설명도 없이 가지 말라고 하니 서운했다. 생각해보면 소풍 때 입고 갈 옷도 마땅치 않고 도시락을 쌀 형편도 못 되었기에 어머니도 속상하셨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연탄불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 5학년 때부터는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어 날랐다. 그때는 집집이 상수도가 없었고 동네 공동 수도에서 물을 길어 나르던 시절이었다. 우리 동네는 이대 담 옆에 바짝 붙은 제일 높은 언덕 동네여서 물이 자주 끊겨 신촌 기차역 부근까지 내려가서 길어 온 적도 있었다. 작은 몸에 버거운 물지게를 지고 가파르고 긴 언덕을 숨차게 오르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집에 필요한 물이 없어 곤란한 상황을 장녀인 내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봄 새벽에 다락방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집에서 막내 여동생을 낳으셨다. 여섯째였다. 어머니 나이 서른여덟, 아버지 마흔둘에 삼남 삼녀의 부모가 되셨다. 한 생명의 탄생은 분명 축복이지만 걱정이기도 한 시대였다. 우리집은 더 어려워졌는데,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막내 여동생을 귀여워했다. 학창 시절 나에겐 주말이 없었다. 셋째 여동생은 아홉 살부터 더 어린 동생을 업어 길렀고, 나는 주말이면 여덟 식구 밀린 손빨래를 했다.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 늦게 끝나면 손이 부어 화끈거리고 허리도 아주 아팠다.

그래도 청소년기 중 중학교 시절은 곤궁했지만 유일하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다니던 학교 안에 작은 동산이 있었는데, 수업이 끝나면 스케치북을 챙겨 자주 동산에 올랐다. 오후의 햇살이 오솔길과 나뭇잎 사이를 비추는 숲 속 풍경을 그릴 때 가장 행복했었다. 친구와 함께 동산 언덕에 하얀 솜털로 덮인 민들레 씨앗을 불면 수많은 홀씨가 둥둥 떠오르다 책 속의 상상들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중학생 때 미술대회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봄 조합원
중학생 때 미술대회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봄 조합원공공운수노조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던 해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먼저 다니기 시작한 동네 또래들에게 같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는데,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학교에 가지 못 한 자신들과 비교됐던 것 같다. 이해가 되고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책을 만드는 제본소였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두 달간은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주간 일보다 두 배의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고등학교 입학금과 교복을 맞추고 집에 생활비를 좀 보탤 수 있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형편상 야간 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낮에는 학비를 벌었다. 패션 핸드페인팅을 잠깐 한 적도 있었고, 주로 출판사, 아이스크림 대리점, 대학 등에서 사무 보조나 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고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는 항상 못 미치는 장녀였다. 하루는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부르시더니 학교를 그만 다니라고 하셨다. 그때 남동생은 공고 시험에 떨어져 조선일보사 사환으로 다니며 재수를 하고 있었다. 인문계보다 공고 시험이 더 어려웠던 때였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온전한 취업을 해서 동생 뒷바라지를 하길 바라셨다. 어머니는 본인도 가정 내에서 남녀 차별을 당하셨음에도 자신도 아들과 딸을 차별하셨다. 똑같이 힘든 시기였지만, 남자들이 모든 일에 우선순위였고, 가사에서도 제외되어 상대적으로 여자들이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도 실망스러운 나날들은 이어졌다. 입학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어느 날, 담임은 "여자들은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외모가 안 좋으면 취업이 안 된다"고 했다. 사회에 새로운 출발을 위해 나름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입학한 학생들에게 첫 담임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때는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받지 못 했고, 사람들의 자존감도 높지 않은 시대였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이 듣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격려를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저주와 다름없는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담임은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도움 안 되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사생활과 자랑을 늘어놓으며 속물적인 사고방식을 학생들 앞에 표출하곤 했다. 그 담임 역시 내가 등록금을 제대로 못 내고 있자, 반 아이들 앞에서 우리집을 무시하는 말로 망신을 주었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만난 열두 명의 담임 중 가장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유신 독재가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길들인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위를 하다가 진압군에게 쫓기는 학생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학생들을 숨겨 주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정부에 세뇌당하기도 했지만, 불의에 맞서고 있다고 생각되는 학생들 편이기도 했다. 따갑고 매캐한 최루탄 가스가 짙은 안개처럼 거리를 덮었다. 나는 언론이 통제되고 날조된 나라에서 계몽된 소식을 직접 들을 기회가 없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거대한 권력의 음모와 불안한 시대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암울했던 시절은, 내 안에 내재해 있는 순수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에 불리한 시절이었다.

직업 전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을지로에 있는 여행사 소속의 토산품 센터 경리부에 입사했다. 주로 일본인 관광객이 오는 곳이었는데 인삼이나 귀금속, 나전칠기 등 한국의 특산품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만족할 만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압박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경리부 소속이었지만 단체 관광객이 많이 몰릴 때는 서툰 일본어로 매장 일을 돕거나 소수의 관광객을 잠깐 안내하는 등 그런대로 회사생활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었다.

잠깐씩 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사무직 일을 할 때보다 오히려 활력을 얻었다. 관광 가이드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겨서 잠깐 일본어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은 성 상납이 공공연했던 사회의 단면을 보여 주는 곳이었다. 50대 남자 회장과 젊은 여직원들 사이의 성 상납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제일 어렸던 나에게도 만나자며 접근했었다. 나보다 조금 일찍 입사한 동료는 이미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50대 남자 회장은 그곳에서 절대 권력이었다. 그러던 중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인수되면서 회장은 그 여직원을 본사로 입사시키고, 나는 퇴사하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안양에 있는 캔 제조업체에 경리 책임자로 입사했다. 회사 사장은 교통경찰로 재직 중 모은 부정한 돈으로 평촌에 넓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고, 인색한 사람이었다. 세금을 최대한 안 내려고 내가 이중장부를 하길 바랐다. 전무는 우리 집이 멀어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자신의 집에서 다니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도 있었고, 밤낚시를 같이 가자고 제안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힘들게 거절해야 했다. 그러자 전무는 내가 미지급 퇴사자 월급에 손을 댔다고 근거 없는 누명을 씌웠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화장실에 가서 '펑펑' 울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경리직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게 됐고, 직업군을 바꿀 계획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왕이면 결혼 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우리 부모 세대처럼 남편이나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성도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상 디자인이나 바느질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봉제를 배워야겠다고 결정하고 구로공단에 있는 봉제 공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입사하고 보니 10대 후반의 경력자가 많았다.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는데 친구들은 한창 결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직한 회사는 전 사원이 월요일마다 운동장에 모여서 조회를 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였다. 전 회사의 남자 기능직 사원들은 한 달을 만근하고 시간외수당까지 포함되면 웬만한 사무직보다 많은 급여를 받았었다. 그런데 잔업과 철야 그리고 휴일 근무까지 한 달을 거의 쉬지 않고 꼬박 일하고 받은 월급이 7, 8만 원이었다. 기가 막혔다. 내가 전에 받았던 월급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남자들의 주 직종과 비교해 여자의 주 직종인 봉제 직군 임금이 낮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시간외수당이 근로기준법대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회사 경리 담당에게 이의를 제기하자 담당은 맞게 계산했다고 우겼다. 그러나 나는 법대로 월급 계산을 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다음 날 경리 담당이 나에게 와서 잘못 계산됐으니 다시 계산해 주겠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데 며칠 후 월요일 운동장에 전 사원이 모여 조회를 하는 자리에서 전무는 "우리 회사에 위장 취업자가 있다"라고 말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회사생활이 불편해졌다. 내가 처음에 자신들 대신 이의를 제기했을 때는 시원해했으면서도 내가 위장 취업자라고 소문이 나자 나를 부담스러워 했다. 나는 그곳에서 혼자 적응하기가 힘들고 무엇보다 저임금을 받으며 회사에 기여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퇴사하게 됐다. 그리고 소박한 목적이나마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허탈감과 당시 사회의 벽을 느꼈다. 그것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오를 수 없는 유리 벽과 천장 같은 것이었다.

그때와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직업 전선에서 고뇌하는 젊은 날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연재5-2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이봄씨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조합원입니다.
#공공운수노조 #여성노동자 #생애사 #성차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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