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김영진 선생 관련 PPT 자료.80이 훌쩍 넘은 김영진 선생은 다시 고국을 방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다.
박태신
숙소 '태권도원' 강의실로 돌아와 작품론 발표를 들었다.
1920년대와 비교해 1930년대는 다양한 문학적, 사상적 흐름이 혼재했던 '한국문학사의 황금기'였다.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모더니즘이 등장했고, 카프문학과의 이런저런 대결 양상이 첨예해졌다. 인쇄매체가 다양해져 비평의 장이 넓어졌고. 그래서 시인(김기림, 윤곤강 등)과 소설가(임순득)도 비평에 합류하던 시절이었다. 김환태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했지만, 비평이 본업이었다.
비평가로서 김환태는 작품 분석을 거부하고 대신 심미성과 감동, 공감, 상상력을 중요시했다. "한 작품의 중심생명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을 연애할 때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비평이란 감상이 좀 더 세련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비평을 너무 어렵게만 여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론을 발표한 문기봉 선배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문학기행'의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에 있다. 2년 전 '워킹홀리데이'의 일원이 돼 무주에서 5개월 지내는 동안 김환태 비평가를 알게 됐으며, 오랫동안 김환태 자료 수집을 해왔고 널리 알렸다고 한다.
그러다 놀랍게도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에 사는 아들 김영진 선생과 연락이 닿았다. 80이 훌쩍 넘으셨다. 문 선배는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김환태 작가의 가족사도 알게 되었다.
김영진 선생에 따르면 어머니 박봉자 여사가 결혼 전 YWCA 일을 하셨는데, 그 일로 박정희 정권 때 신문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 모두가 평생 미국에서 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3년 여동생 김인자 님과 함께 무주를 방문한 일, 관리 유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예술적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진 부모 묘지 재건립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