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희 박사는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4·3을 바라보면서,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관계와 책임 공동체를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지속하고 있다. ⓒ 황의봉
열여섯 살 소녀가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꿨다. 바닷가로 가서 물에 손을 담갔는데, 뼈들이 만져졌다. 그 뼈들을 건져 공동묘지 무덤 옆 비석 위에 올려놓고 오는 무서운 꿈! 어머니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이고! 네가 외할아버지 꿈을 꿨구나!" 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그날 처음 4·3을 겪은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사연을 듣게 됐다. 어머니가 들려준 당시의 사연은 이랬다.
1948년 11월 7일,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서 살던 어머니(당시 8살)는 남동생(당시 5살)과 함께 골목길에서 놀고 있었다. 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초가집을 하나둘씩 불태워 가자, 어린 남매는 근처 대나무밭에 숨었다. 두려움에 떨며 부모님을 밤새 기다렸는데 어머니만 오셨을 뿐 아버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렇게 우연히 꿈속으로 찾아온 4·3은 소녀에게 '질문'에 답을 구하는 긴 여정을 떠나게 했다.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린 남매였던 어머니와 외삼촌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우리 집 말고 다른 집에도 이런 사연들이 있을까? 이때부터 소녀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길에 나섰다.
열여섯 살 소녀 한상희는 세월이 흘러 역사·사회·지리·특수교육을 전공하고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또 '지역 기반 세계시민 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현재 서귀포의 한 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펴낸 여러 저술의 주제인 제주역사와 4·3, 평화와 정의 인권 세계시민 등의 가치를 교육 현장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
▲ 책 <4·3이 나에게 건넨 말> 표지 ⓒ 다봄
4·3 유족이었던 어머니의 세 가지 원칙
한상희 박사가 최근 <4·3이 나에게 건넨 말>이라는 책을 펴냈다. 오랫동안 4·3을 알고, 기억하고, 나누려는 그의 삶이 써 내려간 책이다. 알고 기억하고 나눈다는 것은 4·3과 함께한 자신의 내면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고,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책의 내용이기도 하다.
'4·3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그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4·3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으로 성숙해진다. 적극적 평화, 세계시민, 회복적 정의의 가치에 대한 탐구와 실천이 그것이다.
한상희 박사의 책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4·3의 광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마치 영화 줄거리를 옮겨 놓은 듯한 자신의 가족사를 들려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와 마주 앉아 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족의 '그날 이후' 삶이 어땠는지부터 물어보았다.
"어린 남매, 그러니까 저의 어머니와 외삼촌은 집이 불타버리자 외할머니의 친정 마을인 남원읍 남원리로 피난했습니다. 거긴 해변마을이라 불타지 않았거든요. 도피자 가족으로 몰리면 총살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외할머니와 어머니 외삼촌은 친정집 마당에 높게 쌓아 놓은 촐(겨울철 소나 말에게 먹일 꼴) 속에 숨어 있었다고 해요.
친정집이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길쌈 솜씨가 좋았던 외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옷감을 짜고 옷을 만들어 주는 생활을 했다고 해요. 외할아버지는 1999년 수형인 명부가 발견되면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다가 총살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요.
어머니는 얼마 후 남원리 이모 집에 맡겨졌는데, 11살 때부터 해녀가 됐습니다. 돈 주고 사야 할 장비가 없이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외삼촌은 16살에 가구공장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웠고, 28살부터는 목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가지는 못했지만, 영어와 한자를 독학으로 익혔고 목수가 된 후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무료로 수리해 주었답니다. 고향 집이 불에 타버린 후 어렵게 살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해요.
어머니는 20살에 결혼을 했는데, 그 후에도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기 위해 쭉 물질을 했지요. 저희가 8남매입니다. 아버지 형제들과 사촌들이 모두 희생됐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이 없었거든요. 외로움에 사무쳤던 어머니와 외삼촌은 어릴 때부터 약속했다고 합니다. 친척 없이 사는 것이 너무 외로우니 나중에 결혼하면 자식을 많이 낳아 그 아이들이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이죠. 외삼촌은 7남매를 두었습니다."
졸지에 4·3 유족이 되어 힘겨운 삶을 이어가야 했던 어린 남매의 사연은 이제 그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한상희 박사의 형제자매들이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혹시라도 4·3 때처럼 자식들을 돌보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 저희가 어머니 아버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8남매가 각자 자급자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공동체를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님은 저희가 어렸을 때부터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는 '직업의 원칙'입니다. 8명의 자녀에게 각자의 재능과 취향을 고려해 어떤 직업을 가질지 정해주셨어요. 먹어야 사니까 요리사, 아프면 치료해야 하니 의료인, 법을 알아야 하니 법률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을 농부, 학교 선생님 등이 권하신 직업이었습니다. 우리끼리는 이를 직업예정설이라고 불렀지요.
다음은 '스무 살 독립의 원칙'입니다. 스무 살이면 단지 성인이 되는 나이가 아니라 심리적·경제적 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 스무 살 이후에 부모님에게 받은 용돈과 학비는 나중에 갚아야 할 것으로 아버지가 수첩에 적으셨어요. 라벨지도 붙여가면서. 어려서부터 이런 원칙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에 저는 남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어요. 나중에 제가 학급 담임을 맡았을 때 이 원칙을 교육자료로 잘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중1이면 열네 살 독립의 원칙이라고 바꾸는 식으로 말이죠."
한상희 박사의 부모님이 세운 자식 기르기 3원칙의 마지막은 '형제 책임주의'였다고 한다. 8남매가 위아래 구분 없이 서로를 도와주면서 똘똘 뭉쳐 살라는 뜻이었다.
"저는 이 형제 책임주의가 가장 맘에 들었습니다. 나에게 든든한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와 격려를 받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 원칙은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혈연관계를 넘어서 확대가 되더라고요. 전국에서 온 교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남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형제 책임주의가 확장되는 것이지요.
저희가 2남 6녀인데, 형제 책임주의를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로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하는 말들을 서로 하곤 합니다. 현재 4명이 육지에, 4명이 제주도에 살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언니와 동생들이 편찮으신 어머니를 보러 옵니다."
농부의 길을 가기로 했던 딸은 교사가 됐고, 박사가 됐다. 부모님이 정해준 직업의 원칙이 실제로는 어떻게 됐을까?
"제가 교육자가 된 건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밭을 팔아버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밭이 없어지니까 아버지가 저보고 꿈을 바꾸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언니가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으니 아버지 말이 틀릴 수도 있다, 하면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무조건 대비해야 한다고 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진로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여동생도 교사가 됐고, 언니는 약사가 됐어요. 경찰도 직업의 원칙에 따라 배출했는데, 나중에 수의사로 바꿨고, 원래의 역할은 아니었지만 농부도 나왔습니다. 8남매 중 4명이 애초의 계획대로 간 것 같습니다."
'한국판 쉰들러'... 선의 시민성 보여준 사람들
▲ 강요배 작 <한라산 자락 사람들> 책 <4·3이 나에게 건넨 말>에는 강요배 화가, 김기삼 사진작가, 고현주 작가의 그림과 사진 다수가 함께 수록돼 있다. ⓒ 다봄
<4·3이 나에게 건넨 말>을 읽다 보면 이 책이 단순히 4·3의 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만 쓰인 책이 아님을 알게 된다. 4·3의 광풍이 휩쓸던 상황에서도 용기 있는 사람들이 보여준 감동적인 사연을 통해 '선의 시민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세계시민, 적극적 평화, 공동체 회복 등 사례를 통해 평화 인권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라는 유대인 여성 학자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책을 썼는데 2000년대 중반에 우리말로 번역 출판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졌습니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의 재판을 보며 느낀 것에 관해 쓴 책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보면서 성찰과 비판적 사고를 하지 않은 채 무조건 명령에 복종한다면 누구나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보고 '악의 평범성'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반면에 극한상황 속에서도 인간애를 보여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이 제주 4·3에서도 있었어요. 그래서 악의 평범성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선의 시민성'을 떠올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공적인 영역과 관련한 행위를 할 때 나의 행동과 판단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타인의 처지에서 판단해서 행동하는 그런 시민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 4·3 평화기념관 답사 한상희 박사가 전국에서 온 교사들을 대상으로 4·3 당시 '선의 시민성'을 발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021년 10월. ⓒ 한상희
엄청난 규모의 폭력과 살상, 인권 유린이 난무했던 4·3 현장에서 선의 시민성을 보여준 사례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2018년도에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된 문형순 서장이 있습니다. 이분은 1948년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할 때 무장대에 협조한 주민들이라며 끌려온 사람들을 '서청'(서북청년단)이 취조하려고 하자 강요에 못 이겨 식량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순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서청 단원들을 물리치고 주민들이 스스로 자술서를 쓰게 했고, 이를 본 군인들이 별 내용이 없다며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100여 명의 주민이 문형순 서장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해서 마을 어귀에 공덕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 직후 내무부 치안국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에 대한 불법적인 예비검속 지시가 각도 경찰국장에게 내려왔어요. 이에 당시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와 있던 문형순 서장은 '예비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이라는 명령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형순 서장은 명령서 오른쪽 윗부분에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써서 명령서를 돌려보냅니다. 그러고는 구금된 200여 명을 풀어주었어요. 경찰서장이라고 해도 계엄령 아래에서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4·3 무장봉기 초기에 사태를 초기에 해결하기 위해 무장세력과 협상했던 김익렬 연대장도 있었지요. 이분은 미군이 초토화 작전을 명령했지만, 동족을 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판단해 거부했다가 해임됐습니다. 4·3 때 토벌대가 마을 구장(현재의 이장)들에게 주민들의 성향을 물어 학살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원읍 신흥리 김성홍 구장은 자신의 답변이 애꿎은 희생으로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토벌대의 추궁에 무조건 '모른다'라고 버텨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일로 이분은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경찰 중에도 소신껏 행동해 무고한 희생을 막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성순 경사나 조천지서 신촌파견소에 근무했던 김순철 순경이 그런 분이었고요. 4·3 무장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문치사 사건을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내용의 감정서를 작성한 의사 장시영은 은폐될 뻔한 사건을 밝히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현기영 작가의 최신작 <제주도우다>에 나오는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이지요. 또 한백홍 선생은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는데, 토벌대가 마을 청년 6명을 총살하려고 하자 마을 유지 송정옥씨와 함께 앞에 나서서 '청년들의 신원을 우리가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아 달라'고 했다가 두 사람을 포함해 8명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4·3의 와중에 선의 시민성을 발휘한 의인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높은 도덕의식과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 준 분들이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 현실에 비추어 특히 강조하고 싶은 유형의 의인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문형순 서장님을 꼽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발생하는 범죄를 보면 공무의 형태를 띠고,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4·3도 마찬가지였고요. 문형순 서장의 용단과 정의로운 판단은 경찰뿐 아니라 공직자들과 모든 시민이 본받아야 할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형순 서장의 사례에서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란 교훈을 얻어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번은 교육행정 관련한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는 말을 제 식으로 바꿔서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교육적이지 않으면 행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회복적 정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한상희 박사가 4·3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과와 용서, 화해, 그리고 회복적 정의에 맞춰져 있다.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하는 회복적 정의란 무엇일까.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게 잘못한 만큼 벌을 주는데 이게 응보적 정의입니다. 이때 가해자는 벌을 받았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는 불만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반면 공동체는 그가 보복할까 두렵기도 하고, 피해자는 가해자 처벌과 관계없이 정신적·육체적 상처에서 쉽게 치유가 되지 않은 채 불안하게 살아가겠지요. 응보적 정의는 법의 심판으로 얻어낸 최소한의 정의일 뿐입니다.
반면에 가해자가 자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해 진정 어린 사과를 함으로써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비로소 법적인 처벌 외에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피해자가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공동체도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겠지요. 사과와 용서를 통한 화해가 바로 응보적 정의를 뛰어넘는 정의, 즉 회복적 정의입니다."
이 회복적 정의가 4·3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을까. 어쩌면 4·3의 가려진 진상을 드러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일 듯싶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갈등에서도 회복적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이에 대한 평가가 궁금하다.
"최근 4·3 수형인 재심 법정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요. '수십 년간 희생자들은 통한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유족들의 진술을 들어보면 죄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십시오.' 이 말은 유족이나 변호사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검사가 목메어 울먹이면서 무죄를 구형하는 놀라운 풍경이 벌어졌던 겁니다. 이에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때 피해자와 유족들은 위로받는 느낌이 들겠지요. 바로 회복적 법정인 셈입니다.
반면 올해 75주년 4·3 추념식에선 자신들을 서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제주 시내에 4·3을 폄훼하는 현수막이 내걸렸잖아요. 이건 회복적 정의와는 상반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적 법정뿐 아니라 회복적 마을, 회복적 교육, 회복적 역사 등등 각 분야에서 조금씩 진전을 이루다 보면 마치 시소처럼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서 회복적 정의가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 제주 4·3 현장체험 연수 2023년 11월 11일 한상희 박사가 유치원, 초중등, 전문직 교사들과 함께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 등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답사했다. ⓒ 한상희
▲ 큰넓궤 답사 전국 파워블로거 기자단과 함께 4·3 당시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안덕면 동광리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2018년 4월. ⓒ 한상희
4·3은 현재진행형
한상희 박사는 4·3을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강의와 유적지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15년 유네스코 세계교육포럼에서 195개 국 교육전문가들에게 주제 발표한 것을 비롯해 각 시도 교육청 교사 연수를 통해 4·3의 진실과 교훈을 설파해왔다. '교사들의 역사 교사' 역할을 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와 반응들이 있었을까.
"2015년 이전까지는 주로 제주도 내 교사나 학생을 대상으로 4·3 교육을 해왔다면, 2015년 5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교육포럼이 계기가 돼 그 이후로는 전국의 교사를 상대로 하게 됐습니다. 유네스코 교육포럼에서 발표한 주제가 '제주에서 세계시민을 만나다'라는 것이었어요.
'제주 4·3은 비록 광풍이었으나 그때 시민성을 발휘했던 사람들을 통해 나는 정의로움을 배울 수 있었다, 여러분들의 고향에서도 세계시민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상호 연결돼 있고 관계망이 형성돼 있으므로 서로 연대해야 한다, 저 멀리 있는 지역이나 국가에 대해서도 염려해 주고 연민을 갖고 환대를 하는 게 세계시민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당시 발표의 요지였습니다.
2015년은 제가 역사·사회 교사로 일하던 때였는데, 또 그해에 교육부로부터 전국의 역사 전공 교사들의 제주도 연수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이때 4·3 관련 내용을 80%나 배정해 진행했는데, 예상외로 반향이 컸다고 해요. 연수 후에 교사들이 평소와 달리 모두 한 페이지 이상씩의 소감문을 제출하고, 앞으로도 이 연수를 유지시켜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다음 해에는 전국의 역사과목 수석교사 40명이 똑같은 반응을 냈고요."
세계에서 온 교육전문가와 국내 역사 교사들을 상대로 한 한상희 박사의 4·3 이야기가 커다란 울림이 있었기 때문일까. 2016년 9월에 제주도 교육청 장학사로 발령이 나고, 2017년엔 '4·3의 전국화'라는 임무를 맡게 됐다.
"2017년엔 전국의 역사 담당 장학사를 대상으로 4·3 연수를 했어요. 이렇게 2015년을 기점으로 교육부와 각 지역 교육청들의 요청과 도움으로 전국의 선생님들을 상대로 4·3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연수 때 애월읍 하귀리에 있는 영모원을 자주 찾고 있습니다. 이 마을 출신 항일 애국열사, 한국전쟁 전몰 호국인사, 4·3 희생자의 영령을 한곳에 모신 합동 위령제단인데, 그곳의 비문에 쓰여 있는 한 대목을 강조하곤 합니다. '죽은 자는 눈을 감고, 산 자는 손을 잡으라'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교사 연수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들 중에는 제가 강의하고 답사한 내용을 글로 써달라는 요청을 하신 분들도 있었어요. 그동안 엄두를 못 내다가 마침 출판사 편집장이 제 4·3 답사에 함께한 것이 계기가 돼 이번에 책을 내기에 이른 것이죠."
제주도에선 지금도 방송이나 신문에서 단 하루도 4·3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날이 없다. 한마디로 현재진행형의 이슈다. 그러나 제주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는 4·3은 아직도 오래전에 지나간 불행했던 역사 정도로 여겨왔던 게 사실이다. 전국 각지에서 4·3과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 온 한상희 박사는 제주 바깥에서의 4·3에 대한 반응과 인식변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직 많은 사람이 4·3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사실입니다. 그동안 학교 역사 수업에서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고, 교과서에도 이제야 조금 반영이 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4·3 연수 교육을 받은 선생님들은 4·3을 외면하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교육 분야뿐 아니라 시민사회와도 함께 가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4·3에 관한 관심은 요즘 점차 높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 현기영 작가와의 대담 지난 10월 21일 대전에서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작가와 <4·3이 나에게 건넨 말>의 저자 한상희 박사가 '우리는 왜 4·3을 말하는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한상희
▲ 토크 콘서트 '우리는 왜 4·3을 말하는가' 제주4·3 75주년을 맞아 지난 4월1일 서강대 예수회센터에서 현기영 작가, 강우일 주교, 김종민 4·3중앙위원회 위원과 함께 대담을 진행중인 한상희 박사(맨 왼쪽). ⓒ 한상희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없다
최근에는 현기영 작가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는 토크 콘서트를 지속하면서 우리 사회가 4·3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지에 관해 모색하고 있다. 올해 4월 1일에는 천주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한 4·3 75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우리는 왜 4·3을 말하는가'에서 사회를 맡기도 했다. 강우일 주교, 현기영 작가, 김종민 4·3중앙위원회 위원과 함께한 뜻깊은 행사였다.
한상희 박사는 딱딱한 내용도 쉽고 흥미 있게 풀어내고 전달해 주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래서 강연의 여왕, 답사의 여왕이란 말도 나왔다. 아마도 4·3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 아니라, 그의 사연 많은 가족사와 삶의 여정에서 체화된 역사의식과 긍정적 인간관, 제주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상희 박사에게 마지막으로 4·3에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최근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배·보상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이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면 곤란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하는 순간 4·3이 박제화되는 걸 경계해야 합니다. 또 4·3이 이벤트화하는 것도 절대 안 될 것이고요. 4·3은 추념식 기간에만 기억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갈등을 회복적 정의에 근거해 풀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역량을 강화하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4·3을 남의 일로 치부하면 안 되고, 우리 사회 모두의 관심사로 삼는 당사자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제주 4·3은 우리 모두의 역사입니다'라는 문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펴내면서 제목을 '4·3이 나에게 건넨 말'이라고 한 이유도 모든 사람이 4·3이 자기에게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평화와 인권, 정의 통일의 상징으로서의 4·3을 잘 활용해서 우리 사회가 부딪치는 문제들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현기영 작가는 <4·3이 나에게 건넨 말>의 추천사에서 "한상희 박사가 전하는 역사적 진실은 예리하게 다듬어져 명쾌하지만, 그걸 전하는 방식은 무척 친근하고 다정해서 꼭 늦은 밤 친구들과 구운 감자를 놓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한상희 박사의 책을 계기로 4·3이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에서 벗어나 회복적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미래지향적인 의미로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기를 기대해 본다.
▲ 북 콘서트 웹자보 <4·3이 나에게 건넨 말> 출간을 기념한 제주 북 콘서트가 11월 25일 열린다. ⓒ 한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