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 작가는 1978년 중편 <순이삼촌>을 발표해 금기시해오던 제주4·3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낸 이래 제주도가 겪은 엄청난 비극적 사건을 수많은 소설로 형상화함으로써 4·3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황의봉
제주4·3 76주년이다.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3만여 명이 희생됐음에도 억눌린 채 숨죽이며 지내야 했던 제주는 이제 비로소 봄다운 봄을 맞이하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도 왜곡과 폄훼의 망언이 사라지지 않고, 파헤쳐야 할 진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제주도 출신 작가 현기영은 이 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중편소설 <순이삼촌>으로 4·3의 비극성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낸 때가 그의 나이 37세. 지난해 장편소설 <제주도우다>를 출간하기까지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세월 동안 4·3을 다룬 수많은 역작을 발표해온 현기영 작가는 올해로 83번째 봄을 맞고 있다. 4·3문학의 상징이 된 현 작가, 그의 인생에 드리운 4·3의 기억과 고통 그리고 되새겨야 할 의미와 과제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현 작가와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그를 4·3문학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순이삼촌>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건 유신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를 통해서였다. 1948년 이래 30년이나 금기시돼온 4·3을 주제로 한 소설이 세상에 나온 것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제주 출신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이런 소설을 쓰게 했을까, 아니면 체질적으로 반골 기질이 작용했던 것일까?
"저는 처음에 순수문학을 할 생각이었죠.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아버지>라는 단편으로, 이게 데뷔작입니다. 거기 보면 심리적 갈등을 겪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4·3이 막연한 배경으로 나옵니다. 이 소설은 이데올로기 같은 것 없는 순수문학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저도 모르게 4·3의 억압적인 분위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어요. 데뷔하고 나서는 그전에 습작했던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한 1년쯤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제가 4·3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당시 4·3을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그냥 그쪽으로 끌려가더라고요. 저에게 반골 기질이 있기는 하지만, 작정하고 4·3을 다루어야겠다 정한 건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용기를 낸 것도 아니었고요. 어떻게 보면 유신체제 공포 정치가 온 국민을 억압하고 있었던 시대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던 것 같아요.
이 공포 정치의 주체가 군부였잖아요. 그리고 4·3 대학살도 군부의 범죄였으니까 이걸 얘기하지 않고서는 내가 문학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뭐라고 발언을 하고 난 다음에야 문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춘문예라는 문단 등용문을 통해 작가가 되었지만, 글을 쓸 권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랄까, 제주도민 모두가 앓고 있는 트라우마를 얘기해야만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등단한 지 3년 만에 현 작가는 <순이삼촌>을 세상에 내놓는다. 400여 명이 집단학살 당한 북촌리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학살 현장의 시체 더미에 깔려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순이삼촌'이 한평생 피해의식과 신경쇠약 등에 시달리다가 결국 학살터였던 옴팡밭으로 다시 들어가 목숨을 끊고 만다는 줄거리다. 4·3의 진상이 철저히 가려졌던 시대, 제주도민 누구도 입밖에 4·3을 떠올리지 못한 시절이었다. 어떤 반향이 있었을까.
"<순이삼촌>을 써놓고 나서 두려웠어요. 출판을 했던 창비사에서도 겁이 났는지 한 3개월을 묵히더라고요. 작품이 발표되자 문단은 물론 지식인사회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고, 힘을 얻었죠. 그러면서 설마 나를 어떻게 하랴, 하면서 두 편을 더 썼어요. <도령마루의 까마귀>와 <해룡 이야기>로 역시 4·3을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무서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세 편을 쓰고는 이제 순수문학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순간에 그만 절 잡아서 족치는 거 아닙니까."
현기영 작가가 결국 고초를 겪게 된 건 1979년 <순이삼촌>을 비롯해 4·3을 다룬 작품들을 묶어서 소설집 <순이삼촌>을 낸 것이 빌미가 됐다. 자신의 교사 시절을 그린 자전적 소설 〈위기의 사내〉에서 당시 합수부에 끌려가 당한 고문을 "아, 이 고통스러운 육체를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정신을 배반하는 육체, 제 몸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줄이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까무러치기라도 했으면…"이라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경험이 그의 이후 소설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10·26 후인 11월 24일에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이 있었잖아요. 윤보선 함석헌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이 주도한 유명한 사건이지요. 그때가 <순이삼촌> 소설집이 출간된 직후였습니다. 그 무렵 저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영어 선생을 하고 있으면서 제주사회문제협의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제주도 출신 후배들과 어울리고 있었어요. 그날 후배들을 만나 막 새로 나온 소설집도 줄 겸 YWCA 집회에 간 것이었는데, 마침 후배 한 명이 붙잡히고 만 것입니다. 제 소설집을 소지한 채로 말이죠. 그 바람에 저에게도 불똥이 튄 것이지요. 사건 발생 이틀 후 학교에서 수업 중 연행돼 끔찍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순이삼촌>이 판매금지가 됐고요.
당시 고문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소설을 더 이상 써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4·3 이야기를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다만 톤은 낮췄습니다. <순이삼촌>이나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가 굉장히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던 것에 비해 좀 부드러워진 거예요. 예를 들어 <아스팔트> 같은 소설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사실 4·3을 지나면서 제주도민들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라지고 했지만, 거대한 학살 세력에 의해 당한 다 같은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악랄하게 행동한 가해자들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말이죠."
"<순이삼촌>은 4·3 영령이 명령해 어쩔 수 없이 쓴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