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10 06:47최종 업데이트 24.07.10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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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황정민이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 연극 '리차드 3세' 프레스콜에서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2022.1.13.연합뉴스
 
출판이 위기라지만 여전히 많은 책이 출간된다. 내 전공인 영문학 연구나 틈틈이 쓰는 평론 대상인 한국문학 작품과 비평도 미처 따라 읽기 힘들다. 번역 소개되는 영문학 관련 작품과 저서도 출간된 것도 모르고 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책 중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 인문·사회과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홀베르그상 수상자이고 저명한 셰익스피어 연구자인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폭군>이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책은 셰익스피어가 형상화한 포악한 군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저자가 현실에서 겪었던 좌절감을 돌파하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저자는 책을 구상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밝힌다.


"선거 결과가 나의 최악의 우려를 확정하자, 나는 저녁 밥상에서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세계와 오늘날의 미국 상황이 아주 비슷하다는 얘기를 나의 아내 래미 타고프와 아들 해리에게 해주었는데, 그들은 그 얘기를 듣더니, 그걸 주제로 삼아 책을 한번 써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이 구절의 선거 결과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걸 가리킨다. 나는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의 보편적 호소력을 쉽게 주장하는 태도에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때로 고전은 당면한 문제를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게 도와주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작품이 그렇다. 한국 독서 시장에서 셰익스피어는 그가 쓴 4대 비극이 주로 알려졌다. 그린블랫은 <리어왕>이나 <맥베스> 같은 비극도 다루지만 덜 알려진 역사극에 나오는 리처드 3세, 코리올라누스 같은 독재자도 조명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스티븐 그린블랫의 <폭군> 겉표지비잉
 
셰익스피어는 독재 체제의 사회적이며 심리적 요인, 특히 독재자의 뒤틀린 욕망의 뿌리를 예리하게 드러낸다. 셰익스피어는 탁월한 사회 비평가이지만 동시에 예리한 정신분석가이다. 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폭군의 형상과 욕망이 옛날얘기가 아니라는 게 이 책이 말하는 포인트다.

그린블랫의 분석에 따르면 독재의 탄생은 광범위한 주변의 공모가 없이는 어렵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왕정 국가를 다루지만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작동하는 권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왜 많은 사람이 통치할 자격이 없는 지도자, 충동적이거나 사악할 정도로 음모를 꾸미고 진실 여부에는 무관심한 자에게 끌리는가? 예컨대 저자도 우려한 트럼프 집권기에 더욱 강력해진 탈진실(post-truth)의 영향력은 거짓, 무례, 잔인함이 정치인의 결함이 아니라 추종자를 키우는 힘이라는 걸 입증했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는 오랫동안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서평가/비평가였던 미치코 가쿠타니의 책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참조)

왜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 아무 문제가 없다는 독재자의 뻔뻔함, 오만함, 무례함을 용인하는가? 저자가 찾은 셰익스피어의 숨겨놓은 해답을 살펴보자. 

셰익스피어는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이들도 돌아가는 상황을 사실은 잘 모른다는 걸 파악했다. 대중은 권력자와 그의 조력자들이 국내외 정세를 이성적,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력의 집행자들은 종종 대중만큼 무지하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폭군과 조력자의 책상에는 수많은 정세 분석과 예측 보고서가 쌓인다. 하지만 국가 재정을 동원해 운영하는 스파이 조직,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거의 눈먼 사람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 점을 잘 보여준 영화가 영국 앤 여왕 시대를 배경으로 권력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의 황당함을 다룬 <더 페이버릿>이다. 

셰익스피어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폭군인 리처드 3세를 다룬 작품 <리처드 3세>, 그리고 <헨리 6세> 3부작에서 야심만만한 독재자의 특징을 압축해 제시한다. 한계를 모르는 이기주의, 자의적인 법률 위반, 남에게 고통을 가하며 즐거워하기, 남을 제압하려는 충동 등이 특징이다. 리처드 3세의 형상화가 보여주듯이 폭군은 병적일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남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지만, 남들의 요청은 외면한다. 폭군이 원하는 충성심은 정직, 명예, 책임 등이 아니다. 그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고 망설임 없이 이행하려는 굴종의 태도다. 독재적이고, 편집증적이며, 자기중심주의적인 통치자가 고위 관리에게 충성심을 요구하고 지배층이 거기에 굴복하면 나라는 위태로워진다는 걸 셰익스피어는 작품으로 보여준다. 

리처드 3세가 보여주는 통치의 잔혹한 기술은 사람들에게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능력이다. 그는 강요, 말 바꾸기, 폭력, 위협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지배 욕망을 강제한다. 아무도 그를 따돌릴 수 없다. 폭군이 보여주는 냉소, 잔인함, 배신에는 비밀이 없다. 그는 수치심을 모른다. 노골적이고 뻔뻔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묻는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영국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대목이다.

독재의 조력자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 토요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박람회장에서 열린 예비선거 전야 파티에서 연설하고 있다AP=연합뉴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견해를 이렇게 추론한다. 폭군의 통치가 작동하려면 폭군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동조와 묵인을 끌어내야 한다. 폭군은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시대보다 훨씬 복잡한 국내외 관계가 작동하는 우리 시대에는 그런 조력자는 국내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찾아야 한다. 이런 조력자들이 폭군을 도우면 영국이든 어떤 나라든 패망에 처한다. 

그린블랫은 <리처드 3세>를 분석하면서 독재의 조력자를 여섯 그룹으로 나눈다. 역시 우리 시대에도 발견하는 모습이다. 첫 번째 그룹은 리처드에게 진짜로 속은 이들이다. 리처드 3세의 주장을 정당하다고 여기고, 약속을 믿었고, 리처드 3세의 감정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지 않겠어. 그러면 나는 그 의미로부터 책임이 없게 될 테니까." (<리처드 3세>, 1막 4장) 이런 무책임과 수수방관하는 태도가 독재자의 횡포를 도와준다.

두 번째 조력자는 리처드가 행사하는 괴롭힘과 위협 앞에서 겁을 먹고 무기력해진 이들이다. 리처드가 미친 듯이 위협하자 저항도 점점 시들해진다. 세 번째 그룹은 리처드가 사실은 사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리처드가 병적인 거짓말쟁이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사례를 애써 잊는다.

네 번째 조력자는 리처드가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국가 운영은 굴러간다고 믿는다. 다섯 번째 그룹은 가장 음흉한 조력자인데, 리처드가 권좌에 오르면 자신들도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돕는다. 여섯 번째 그룹은 리처드의 명령을 아무 생각 없이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권력의 명령을 이행하면서 사소한 떡고물이라도 챙기려 한다. 

<맥베스>는 좀 더 심층적으로 독재자의 감춰진 불안감을 파고든다. 셰익스피어는 심리적 불안감과 폭군다운 행동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독재자의 불안감의 원인은 남자다움을 증명하려는 욕구, 성적 불능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충분히 강한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려, 실패에 대한 공포 등이다. 이런 불안감을 억누르려고 나타나는 반작용이 남을 괴롭히기, 여성 혐오증, 잔인한 폭력 등이다.

<코리올라누스>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권력자가 보여주는 유아적 나르시시즘, 불안정함, 잔인함을 만난다. 어린아이를 성숙한 성인으로 키워내야 하는 성인이 처음부터 폭군 주위에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아이의 나쁜 성질을 더욱 부추기는 쪽으로 키웠다. 폭군은 정신분석에 따르면 심리적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다. 

셰익스피어는 폭군과 추종자들은 결국에는 실패한다고 보았다. <리어왕>이 보여주듯이 그들 자신의 사악함, 어리석음과 민중의 인간적 감정에 의해 파멸한다. 셰익스피어가 보기에 난세를 바로 잡는 힘은 평범한 시민의 정치적 행동에서 나온다.

셰익스피어는 사람들의 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자세히 묘사한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서 보통 사람들은 독재자를 지지하는 함성을 외쳐 달라고 재촉받을 때 침묵한다. <리어왕>처럼 사악한 주인이 죄수를 고문할 때 그 악랄함에 저항하는 하인도 있다. 경제적 정의를 요구하는 배고픈 시민들도 있다. "불을 피우려는 것은 이단자이지 그 안에서 타는 여자가 아닙니다."(<겨울이야기> 2막 3장)

독재의 효과는 권위의 전반적 구조를 뒤집는다. 적법성은 더는 권력에 있지 않다. 오히려 국가 폭력의 희생자, "타는 여자"에게 있다. 셰익스피어가 다룬 왕정 국가에서조차도, 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길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 공학만으로는 계산하기 어려운 요소가 작용하여 브루투스나 맥베스 같은 이상주의자나 독재자는 사태의 진행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독재 체제를 묘사한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공동체의 소생과 합법적 질서의 회복을 기대하면서 마무리된다. 세계 곳곳에서 목격하는 우리 시대의 폭군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길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고전이 말해주는 조언에 귀 기울이길 바란다. 


폭군 - 셰익스피어에게 배우는 권력의 원리

스티븐 그린블랫 (지은이), 이종인 (옮긴이), 비잉(Being)(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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