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영화 <디 애프터> 스틸컷
넷플릭스
지인이 알려줘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본 단편 영화 <디 애프터 the After>는 애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불과 18분밖에 안 되는 짧은 영화지만 보고 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묻게 된다. 사람은 어떻게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가? 어떻게 상실을 애도하는가?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많은 한국 사회이기에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2024년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단편 영화 후보작이었다. 줄거리가 별 의미 없고 장면 하나하나를 돌아봐야 하는 영화지만, 내용은 이렇다. 바쁜 사회생활로 딸과 아내와 함께 시간을 못 보내던 주인공 다요(데이비드 오옐로워)는 눈앞에서 무차별적 살인을 일삼는 괴한에 의해 딸과 아내를 잃은 후 깊은 슬픔의 시간을 버틴다. 1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다요는 택시를 운행하며 살아간다.
다양한 사연과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의 택시에 탄다. 다요를 의식하지 않고 승객이 하는 이야기는 다요가 경험했던, 하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고조되던 다요의 감정은 딸의 생일날 태운 어느 가족 때문에 폭발한다.
택시에 탄 부부는 다요의 죽은 딸과 비슷한 나이의 소녀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한다. 카메라는 그 사이에서 우울해하는 소녀와 말없이 소녀에게 공감하는 다요를 비춘다. 부부의 집에 도착한 뒤 소녀가 갑작스럽게 다요를 뒤에서 안아줄 때,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무너진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새로 번역본이 나온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 시집 <나는 무명인! 당신은 누구세요?>(김천봉 옮김, 소명출판)에 실린, 죽음을 다룬 시들이 떠올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디킨슨의 시는 <디 애프터>가 보여주는 죽음의 트라우마, 애도의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우리도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과정이다.
<디 애프터>에서 다요는 택시(공유 차량)를 몰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다요와 승객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승객은 다요가 겪었던 고통을 알 수 없다. 그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섣부른 이해와 공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혹시 내가 죽더라도/ 늘 그래왔듯 평소처럼/ 당신은 살아가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아침은 빛나고/ 한낮은 불타리라./ 새들은 일찍부터 집을 짓고/ 벌들도 부산하게 돌아다니리/ 누구나 지상 모험을 즐기다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법!"(에밀리 디킨슨, <혹시 내가 죽더라도>, 아래 시 제목만 병기)
'나'의 죽음과 '당신'의 삶 사이에는 다른 시간의 강이 흘러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다요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각자는 자신의 "지상 모험을 즐기"기에 바쁘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묘사하지 않는 과감한 생략에서 <디 애프터>의 압축적인 힘이 발생하지만, 딸과 아내의 죽음 이후 다요는 이런 시간을 겪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조문객들이 왔다 갔다/ 계속 밟고, 밟아대는 바람에,/ 감각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 같았다./ (중략)/ 난파되어, 외로이, 여기에 버려진 듯이./ 그 와중에 이성의 받침대가 부서졌고,/ 나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추락할 때마다, 어떤 세상을 들이받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장편 영화였다면 이 시가 묘사한, 다요의 삶을 상세히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나 <디 애프터>는 그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더 강하게 "감각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 같았"고 "난파되어, 외로이, 여기에 버려진", 다요가 겪는 고통을 관객이 실감하게 만든다.
다요가 영화의 마지막에서 무너지는 모습은 디킨슨 시의 구절을 정확히 이미지로 보여준다. 죽은 딸을 연상시키는 소녀의 모습, 그 소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모르고 다투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다요의 "이성의 받침대가 부서졌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추락할 때마다, 어떤 세상을 들이받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결국."
상실의 고통을 겪은 이에게 주변 사람은 그만 잊으라고 말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위로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깊게 베인 마음의 트라우마는 그에게는 거의 지옥의 고통과 같다.
"내 삶은 닫히기 전에 두 번 닫혔다./ 아직은 두고 봐야겠지만/ 불멸이 베일을 벗겨서/ 내게 보여줄 세 번째 사건도/ 두 번 닥친 그것들처럼/ 품기에 너무 거대하고, 너무 절망적일지는/ 이별은 천국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전부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옥이 필요한 이유다"(<내 삶은 닫히기 전에 두 번 닫혔다>).
이별을 겪은 사람이 그 고통을 극복하려면 이별 혹은 죽음이 죽은 사람에게는 천국이라고 스스로를 억지로라도 위로해야 한다. 우리가 조문하면서 늘 세상을 떠난 이의 명복을 비는 이유다. 명복은 저 세상에서의 복, 곧 천국의 복을 말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에게 이별은 지옥이다. 그러면 왜 "지옥이 필요한 이유"라고 시인은 못 박을까?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야만 애도가 끝나기 때문이다.
애도의 과정을 생략한 한국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