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찬란
좋은 문학과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여러 답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답안은 독자와 관객의 감각에 충격을 줘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정치, 경제, 사회적 쟁점을 다뤄야만 그런 작품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과 영화는 언제나 독특한 인물(캐릭터)을 통해 그렇게 한다. 몇 년 전 읽은 김혜진 작가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런 작품을 오랜만에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에는 우리 시대의 뜨거운 쟁점인 노년의 삶, 세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차이와 갈등, 성적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 등이 차분하고 서늘한 어조로 다뤄진다. 이런 쟁점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든, 시대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이라면 외면하기 힘든 주제다. 특히 한국문학계에서는 찾기 힘든 노년의 삶과 감각, 생각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젊은 작가가 과감하게 도전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적 영토의 모습은 다양한 작품의 꽃과 나무가 어울려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문학도 필요하지만, 중년 세대의 문학도 필요하고, 점점 그 숫자가 많아지는 노년의 삶이 지닌 의미와 애환과 명암을 조명하는 문학도 필요하다. 그게 바람직한 문학적 영토의 모습이다.
소설 <딸에 대하여>는 주로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요즘 창작 경향과는 다르게 젊은 여성(대학 강사)이자 성적 소수자(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지닌 딸을 둔 엄마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된다. 소설은 동질적 여성이라는 편리한 구호를 문제 삼으면서, 여성 사이의 차이를 주목한다.
특히 부모와 자식 세대 간의 차이와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에 따른 차별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교차시키는 서사구조를 택한다. 등장인물은 각자의 처지에서 경제적 약자이다. 여성이기보다는 엄마로 자신을 호명하는 '나'는 "예순이 넘"은 전직 교사/현직 요양원 간병인으로 "간병인 파견업체에 소속된 사람"이다. 딸은 비정규직 시간강사이고 그 때문에 고초를 치른다.
엄마 '나'가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정체불명의 여자애"로 부르는 딸의 동성 애인도 고정된 일자리가 없다. '나'가 돌보는 노년 여성도 한때의 활발했던 사회활동조차 기억 못 하는 무기력한 노인이다. 이렇게 유사한 사회경제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지만, 그런 유사함조차 세대 간, 성적 정체성의 벽을 쉽게 넘을 수 없다는 걸 작품은 치밀하게 천착한다. "이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나 나올 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몇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소설 <딸에 대하여>의 미덕은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를 섣불리 판단하거나 고발하지 않고 다만 그 현실 앞에 놓인 '나', 혹은 독자인 우리에게 가능한 태도를 고민한다는 점이다.
엄마는 누구이고, 가족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