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01 17:31최종 업데이트 24.08.0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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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열린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프랑스의 정치적 캐치프레이즈인 '성평등'을 세계에 고하는 무대였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작된 섹션 'sororité'(여성 연대)는 센강 좌우를 수놓은 '프랑스를 빛낸 10인의 여성들'의 금빛 동상을 기렸다.

197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올랭프 드 구주(1748~1793)를 시작으로 1922년 최초의 세계 여자 대회를 조직한 앨리스 밀리아(1884~1957),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자 흑인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인 폴레트 나르달(1896~1985), 지구 일주 항해를 한 최초의 여성 잔 바레(1740~1807),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로 여성 비하 담론에 맞선 책 <여성들의 도시>를 쓴 크리스틴 드 피장(1364~1431?), 사회주의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의 행동 대원이었던 루이즈 미셸(1830~1905), 세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앨리스 기(1873~1968) 등이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이들 가운데서는 임신중지권 옹호에 앞장 선 인물이 3명이나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1974년 보건부 장관이 된 후 임신중단 합법화 법안을 제출해 통과시킨 시몬 베유(1927~2018), 1971년 당대 여성 저명인사들이 피임과 낙태의 적법한 권리를 요구한 '343 선언'에 동참한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와 지젤 알리미(1927~2020)다. 이는 지난 3월 세계 최초로 헌법에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이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등 외교 무대에서 임신중지권 관련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프랑스의 행보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베유법'으로 유명한 베유나, <제2의 성> 저자인 보부아르에 비해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 정치인이었던 알리미의 삶은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임신중지권의 아이콘이자, 강간 중범죄화와 선거 여성 할당제 법제화를 주창한 인물이다. 지난해 3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임신중지권의 헌법 명시를 천명한 장소가 알리미의 추모 행사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방위 페미니스트였던 그의 삶은 '페미'가 '논란'이 되는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정의가 아닌 것은 참을 수 없다"… '임신중지 재판'을 무죄로 이끈 힘

 

올림픽 개막식에서 소개된 지젤 알리미 동상 ⓒ MBC 유튜브 캡처

 
"나는 정의가 아닌 것을 참을 수 없어요."

알리미는 사망 1년 전 <르 몽드>와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같이 요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90년 남짓한 그의 삶은 '참지 않는 삶'이었다. 저서 <여성의 대의>에 따르면 1927년 7월 27일, 프랑스 식민지 튀니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남녀 간 차별에 민감했다. 그는 열세 살 때 단식 투쟁 끝에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오롯이 혼자 힘으로 튀니지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고, 1944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팡테옹소르본대학교에서 법학 및 철학 학위를 받았다. 1949년 변호사에 임용됐다.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은 1972년 성폭행으로 임신중단을 한 미성년자가 낙태 혐의로 기소된 '보비니 재판'에서 피고의 무죄를 이끌어낸 일이다. 고등학생이던 마리 클레르와 그의 어머니 및 동료, 낙태 시술을 한 일반인 등 총 5명이 피고인으로 기소됐다.

당시 형법에 의하면 임신중지를 한 여성은 최소 6월에서 2년, 임신중지를 시킨 사람은 최소 1년에서 5년까지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었다. 알리미는 피고인들의 동의 하에 보비니 재판을 낙태금지법 자체를 심판하는 '정치 재판'으로 만들었다.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유전학의 권위자 자크 모노 교수를 설득해 증인으로 내세우고,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시위를 벌였다. 마리 클레르의 어머니인 미셸 슈발리에는 법정에서 당당히 외쳤다. "재판장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것은 재판장님의 그 법입니다!"

그 결과 마리 클레르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어머니 슈발리에는 벌금 500프랑에 집행유예를, 그의 두 동료는 석방됐으며, 시술 당사자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이 적용됐다. 그 자신도 임신중지 당사자였던 알리미는 사회가 임신중지권을 박탈해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를 체감했기에, 누구보다도 이 재판의 함의를 잘 알았다. 그는 보비니 재판을 두고 "여성의 자유에 대한 확인 즉, 자기결정권 및 피임과 낙태에 대한 여성의 권리에 대한 확인"이라고 풀이했다. 이 재판이 1975년 베유법 통과의 초석이 됐음을 말할 것도 없다.

남녀 동수 후보의 발판을 마련하다

1981년 국회의원이 된 그는 선거 여성 할당제 법제화에 앞장선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정치 참여율이 낮은 현실에 의문을 품는다. 공저로 참여한 책 <페미니즘과 섹시즘>에서 알리미는 '남성은 공공, 여성은 사적인 영역'으로 나뉘는 성 역할 분리가 여전하다고 지적하며, "영구히 남성이 제시하고 결정하며, 여성이 재현하고 동의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1982년 10월, 프랑스 의회는 알리미의 발의에 따라 "후보자 목록에서 같은 성별이 75% 이상 포함될 수 없다"는 '여성할당제' 수정안을 표결했다. 당시 얻어낸 '25%'는 남녀 동수까지 확대하기 위한 작은 발판이었는데, 이후 프랑스는 2000년 '파리떼(Parité)'법을 통해 후보 절반을 반드시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했다. 지역구 후보 3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한 권고 규정은 외면받고, 할당제 의무화 논의는 번번이 백래시에 직면하며, '역대 최다'라는 여성 국회의원 당선인 비율이 20%에 불과한 한국으로서는 아직 멀고 먼 일이다.

페미니스트를 기려야 할 이유
 

지젤 알리미 ⓒ 위키미디어 공용

 
MBC 개막식 중계 화면이 여성들의 동상을 한참 비추자, 실시간 댓글 창에는 "왜 남자는 없느냐"는 식의 비아냥이 올라왔다. 여기에 답이라도 하듯 전종환 아나운서는 말했다. "실제 파리의 공공장소에 남성의 동상은 260개가 있는 반면에 여성의 동상은 40여개 밖에 없다고 해요. 그래서 오늘 같은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또 한 번의 이정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해 봅니다." 동상들은 개막식 이후에도 파리 시내 곳곳에 놓여 이들의 업적을 기릴 예정이다.

지젤 알리미는 <페미니즘과 섹시즘>에서 "역사는 여성들의 진보가 항상 민주주의를 강화했음을 보여준다"고 적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나 페탱(히틀러와 협력했던 비시 프랑스의 국가 수반) 치하에서 임신중지 시 사형을 선고했거나, 여성을 강제로 가정에 묶어 놓는 등 억압하던 체제는 '전체주의를 향한 행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성을 향한 채찍은 국민을 향한 채찍"이며,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기 때문에 인류를 자유롭게 한다"라고 말한다. 프랑스가 위대한 페미니스트를 기리는 이유와, 우리가 살아 있는 페미니스트를 환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신중지권 보장'을 정치적 자산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프랑스와, 낙태법의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 5년 간의 입법 미비 공백 속 '36주 임신중지 브이로그'가 논란이 되는 한국의 현실을 마주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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