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습니다. '온열질환' '폭염' 같은 걱정이 여름이 상징이 된 듯도 합니다. 그럼에도 역경을 딛고 자라나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여름입니다. 이상기온을 뚫고 결실을 맺은 여름 농산물과 알알이 담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8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기자말] |
여름이면 빠지지 않는 제철 과일, 포도. 이르면 6월부터 출하되는 포도는 7~8월, 이맘때가 가장 맛있는 '제철'이다. 이 시기를 맞추기 위해 겨울부터 하우스를 드나든 농민들의 땀방울이 달콤하게 영글어 가는 요즘, 옥천의 두 포도농가를 만나봤다.
[숨숨농장 권성민] 몸에도, 자연에도 좋은 방식을 찾는 중입니다
2022년 안남면으로 귀농해 친환경 포도 농사를 시작한 권성민(35)씨. 그에게 왜 캠벨 얼리를 재배하기로 했는지 묻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이곳은 2022년에 유기농으로 캠벨 얼리를 하던 분이 건강 문제로 그만두시면서 인수하게 됐어요. 저는 다른 무엇보다 유기농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대로 이어서 농사지으면 되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포도 농사에 뛰어들게 됐네요(웃음)."
지난해 작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우스 천장에서 새는 비와 바닥에서 차오르는 물, 거기에 더해 병충해까지 삼중고를 겪었으니 말이다. 이번 겨울에 하우스 정비도 끝냈겠다, 어떻게 보면 올해야말로 그의 "진짜 시작"인 셈이다.
포도 농사는 나무가 겨울 휴면기에서 깨어나는 2월부터 시작이다. 물을 대고 생육 주기에 맞춰 꽃눈을 따고, 가지를 유인하고, 순을 지르고, 꽃송이를 다듬는다. 병해충 방제도 빠짐없이 해줘야 한다.
"일반 농약은 한 달에 한 번이면 되지만 친환경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방제를 해줘야 해요. 부지런해야 하죠. 병충해가 발생하면 한두 그루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절 이상이 영향을 받거든요. 초생재배(유실수 재배지 지표면에 유익한 풀을 심는 유기농법)를 하는 이유도 최대한 약을 치지 않기 위해서예요."
6월이 되면 포도송이 알을 솎는다. 한 송이 에 대략 300~400개의 포도알이 달리는데 이를 방치하면 너무 촘촘히 자라 서로 밀어내다 터지기에 65~80개 정도만 남기는 것이다. 포도 품질을 결정하는 일이기에 포도 농가가 가장 바쁘게 일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성민 씨는 조금 다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제가 시도하고 있는 건 전북 완주 영광포도원 강혜원 대표가 개발한 '강포도농법'이에요. 나무의 힘이 너무 강하면 종족 보존 욕구가 작아져 포도 맛이 없고, 나무의 힘을 통제하면 종족 보존 욕구가 커지고, 열매로 보내는 영양분이 많아져 포도 맛이 좋아진다는 거죠.
이 농법의 특징은 알솎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무의 세력을 적당히 조절해 적당한 수의 포도송이가 달리게 하는 게 핵심이죠. 이렇게 하면 필요한 노동력도 줄고 나무도 더 오래 키울 수 있어요. 보통 7년 정도 지나면 포도 맛이 떨어진다고 베어버리거든요."
6월을 넘어 7월이 되면 포도는 햇빛을 받으며 영글어 간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알맹이가 말랑말랑해지며 껍질도 진한 보랏빛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렇게 40일 정도가 지나면 새콤달콤한 포도가 된다.
"아직 실험하면서 저에게 맞는 재배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일단 유기농으로 포도에 맞는 생육환경을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또 지금처럼 캠벨얼리만 해선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머스캣 함부르크, 매니큐어 핑거, 루비씨드레스, 플레임시드레스, 이탈리아, 세네카 같은 품종도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옥천읍 마암리 황두현] 과포화된 샤인머스캣, 대체품을 찾아서
옥천읍 마암리에서 20년 넘게 복숭아, 부추 농사를 짓던 황두현(55)씨의 첫 포도 농사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그가 속한 부추 작목반 회원이 건강이 나빠지며 농사일이 힘들어지자, 총무였던 그에게 밭을 맡겼는데 그중 일부가 샤인머스캣 밭이었던 것.
"그때만 해도 샤인머스캣 가격이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저도 5년 전에 포도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손은 많이 갔는데 가격이 좋으니까 만족스러웠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가격이 점점 내려가더라고요."
높은 수입을 쫓아 너도나도 품종을 바꾼 결과였다. 생산 물량이 많은 품종을 키우면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바로 출하 시기와 가격이다. 경쟁을 피하고 가장 좋은 값을 받는 방법은 남들보다 일찍 출하하는 것.
"일찍 출하하려면 겨우내 가온(온도조절)해 인위적으로 하우스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거기에 따라오는 시설비용, 에너지비용도 무시할 수 없죠. 또 수요가 가장 많은 휴가철에 맞춰 출하하면 많은 양을 팔 수 있겠지만, 당도가 충분히 올라오지 않은 포도를 팔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해요. 계속 어떤 게 맞나 저울질하게 되는 거죠."
그런 상황임에도 '묘목 시장에선 샤인머스캣 묘목이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라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샤인'의 시대가 끝나간다"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사정을 알고 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대체 품종이 없을까 수소문하고 지인에게 연락하기를 여러 차례, 그렇게 찾아낸 게 바로 BK시들스다.
"군북면에서 묘목을 판매하시는 분을 만났어요. '샤인'의 대체 품종을 물으니 이걸 추천해 주더라고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거니까 부담감이 큰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누군가는 먼저 심어보고, 상품성이 있는지 키워봐야 하니까,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죠."
BK시들리스는 캠벨 얼리와 비슷하지만, 알이 더 크고 씨가 없다. 당도는 샤인머스캣보다 높은 평균 21~25Brix로 신맛이 적어 호불호 없이 누구나 즐길만한 포도다. 여기에 더해 그가 꼽는 BK시들스의 장점은 샤인머스캣에 비해 낮은 노동강도다.
"샤인머스캣은 연세 많으신 분들이 농사짓기 힘들어요. 포도는 수확하기 전까지 순을 매일 따줘야 알이 커지는데, 샤인머스캣은 순이 너무 빨리 자라고 또 잘 안 떨어져요. 고령화 돼가는 농촌에서 농민들이 하기엔 노동력이 너무 많이 필요한 거죠. BK시들리스는 그냥 '툭툭' 치면 떨어져서 연령이 좀 있으신 분들도 어렵지 않게 하실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렇게 그가 BK시들스를 심은 지 3년이 지났다. 나무가 어느 정도 자란 작년부터 여러 시도를 해보고 있다는데, 올해는 나름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올듯싶다.
"작년까지 키워보며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처음엔 샤인머스캣과 똑같이 재배를 해봤는데 차이점이 많았죠. 대표적인 건 송이를 만드는 방법이에요. 샤인머스캣은 위쪽을 잘라내고 아래쪽을 키우는데, 이건 반대였죠. 올해는 알 크기가 잘 나왔어요. 남은 건 착색이 어떻게 나오느냐죠."
재배 시기가 겹친 복숭아밭까지 내팽개치고 매달린 포도가 수확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단단하게 자란 포도알이 연해지며 익어가는 지금, 앞으로 한 달이면 검푸른 빛이 하우스 안을 가득 채울 테다.
월간옥이네 통권 86호(2024년 8월호)
글 임정식 사진 김혜리, 임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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