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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열리자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며 동네를 나섰다. 건너마을에도, 음지말에도 머리에 이기도 하고 양손엔 무엇인가 들려 있다. 여름 농사로 준비한 고추포대가 있고, 힘겹게 키운 암탉이 내 준 계란도 있다. 이십 리가 된다는 면 소재지에서 열리는 추석 대목장, 제물을 준비하고 자식들에게 입힐 옷이라도 준비하기 위해서다. 아껴 두었던 쌀말이라도 내야 감내할 수 있는 추석이 오고 있는 것이다.

해 질 녘, 동네엔 소란함이 가득했다. 추석과 설날에만 하는 동네잔치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벼르고 별렀던 돼지를 잡아 집집마다 몫을 나누고 있다. 언제나 나서기 좋아하는 이웃이 칼을 잡았고, 일 년을 기른 돼지는 동네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며칠 전, 아버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일 년에 한 번은 해야 하는 조상님 묘소의 벌초, 종일토록 낫으로 깎은 풀을 한 짐 짊어졌다. 누런 암소가 앞서 길을 잡았고, 풀 짐 진 아버지가 고삐를 잡고 집을 향해 오는 길이었다. 오늘만은 아버지 발걸음이 가볍다. 동네에서 잡은 돼지고기를 두어 근 끊었다. 포대종이에 둘둘 말아 새끼끈으로 묶은 돼지고기,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먹일 고기가 손에 들린 것이다. 고된 하루하루를 버티며 만난 추석, 오래전 추석절의 동네 풍경이다.
추석즈음의 들녘 논자락에는 누렇게 벼가 익어간다. 여름내 땀을 흘린 농부들의 결실이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벼가 고개를 숙이면 추석이 다가옴을 알려준다. 풍년도 반갑지 않은 쌀값, 변하는 추석의 모습에 조금은 씁쓸하지만 다함께 극복해야 할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
▲ 추석즈음의 들녘 논자락에는 누렇게 벼가 익어간다. 여름내 땀을 흘린 농부들의 결실이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벼가 고개를 숙이면 추석이 다가옴을 알려준다. 풍년도 반갑지 않은 쌀값, 변하는 추석의 모습에 조금은 씁쓸하지만 다함께 극복해야 할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
ⓒ 박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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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달라졌다

지나는 길마다 차량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벌초를 위해 가족들이 다 모인 것이다. 저마다의 품위(?)를 지키려 몰고 온 차량들이 위풍당당하다. 골짜기마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했다.

이 산에서도 그렇고, 온 천지가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였다. 예외일 수 없는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추석 무렵이면 언제나 붐비던 차량들, 왠지 한산한 골짜기다. 묫자리엔 어느새 태양광이 자리했고, 묘소의 모습이 달라졌다. 어느 왕가의 위용을 자랑하던 묘소들,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골짜기에 가득하던 묘소, 대신 들어선 것은 납골묘가 아니면 자그마한 표지석이다. 예초기 소리로 가득하던 골짜기가 조용한 이유다. 세월은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사이, 곳곳에 붙어 있던 현수막도 사라졌다.

벌초를 대신해 준다는 현수막, 전화번호와 함께 펄럭이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묘소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이유다. 가족들이 몰려왔던 시절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힘겨운 시기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물음이다.

추석 전에 만나 벌초를 하고, 굳이 추석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친구의 하소연, 설과 추석이 지나면 차례음식을 며칠간 먹어야 한단다. 친지들에게 주어도 사양하니 버릴 수도 없어 며칠간 먹어야 한단다.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느냐 한다.

먹고살기 힘겨웠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이다. 엄청난 음식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양을 구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란다. 세상은 이만큼 변하고 있으니 혼자만 고집할 힘도 없어졌다.

익어가는 가을 시골길에서 만난 대추가 익어간다.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영글어 가는 대추, 오래전의 추억을 기억해주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 익어가는 가을 시골길에서 만난 대추가 익어간다.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영글어 가는 대추, 오래전의 추억을 기억해주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 박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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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추석 전의 풍경이 전해진다. 재래시장의 모습이 나오고 물가가 올라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졌다는 소식이다. 사과 한 개에 얼마가 된다는 둥, 제사상을 차리려면 적어도 기십만 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고속도로 통행료는 무료라는 소식과 날씨는 어떠하다는 친절한 설명이다. 5일장에서 얻어 입었던 색색옷과 동네잔치는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려면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해봐야 듣지도 않는 소리, 할 필요도 없다는 핀잔이다.

50여 년을 같이 한 친구, 추석 전에 묘소에서 가족들이 모인다. 간단히 술 한잔 따르고 식당으로 옮겨 식사를 한다. 전혀 부담 없고 효율적이었다. 번잡한 교통 지옥 속에 어렵게 만나 음식을 하고 어른을 찾아보는 추석은 변하고 있다.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신세대다운 추석절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은 변해도 뇌리 속 추억은 지울 수 없다. 내 부모가 그랬던 추석, 고집스레 지키고 싶은 추석의 그리움은 기억 속에만 남기기로 했다. 알밤이 툭하고 떨어지고, 붉은 홍시가 보고 싶은 세월은 가버리고 말았다.

홍동백서에 좌포우혜를 배웠던 사람, 하지만 이젠 그걸 고집할 수 없는 세월이다. 알밤을 찾는 아이도 없고,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송편을 추석에 또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 먹거리가 넘치고, 입을 거리가 가득한 세상이다.

차례상에 오른 과일이 아쉬울 리 없는 현실, 굳이 그리움 속의 추석을 고집할 수 없는 세월이다. 조상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생각해 보고, 효율적으로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나 홀로 오래 전의 추석을 고집하며 늙어 갈 수는 없는 현실이다. 젊은이와 어르신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추석절을 고민해 보게 되는 추석 즈음의 세월이다.

#추석#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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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무렵의 늙어가는 청춘, 준비없는 은퇴 후에 전원에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가끔 색소폰연주와 수채화를 그리며 다양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월따라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싶어 '늙어가는 청춘'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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