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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한 살 차인데도 세현이 엄마(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고향인 전라도 고흥이 고향)는 제 집사람에게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친자매처럼 잘도 지냅니다. 지용이 엄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동갑내기인 지용이 엄마와는 고향 친구처럼(제 집사람은 전라도 여수 거문도 옆에 있는 초도(草島)라는 섬, 지용이 엄마는 대우조선이 있는 경상도 거제라는 섬) 잘도 붙어 지냅니다.
여자들 셋 모이면 그릇이 깨진다고 했던가요. 마을에서 삼총사로 불리는 세 여자는 차 마신다 모이고, 김치사발 들고 오락가락 하고, 도회지 나들이도 함께 하며 조금은 시끄럽지만 오누이처럼 잘도 지낸답니다. 한 번은 마을 취재 온 방송 관계자가 삼총사에게 지역감정 없느냐고 묻자 한결 같이 "아뇨 전혀요"라고 퉁소리를 놀 정도로 허구적인 지역감정 따위는 얼씬도 못하게 하며 잘 지냅니다.
어제는 세현이(전남 광양다압초 5학년) 아버지 기일(忌日)이었습니다. 홀로 된 여자들은 이런 날이 유독 쓸쓸하지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칭 '이쁜이'라고 불러달라는 세현이 엄마는 두 언니에게 장을 함께 보러갈 것을 요청했고 지용이 엄마는 "그래"하며 쾌히 승낙했으며 제 집사람은 사정상 순천 중앙시장까지 에스코트만 해주었습니다.
저녁에 또 다시 모인 세 여자, 삼총사가 모이자 바늘 가는데 실 가듯 그들의 예하 병력인 지용, 지훈, 세현, 세원, 승, 솔 등 6명이 뒤 따라 들이닥쳐 (참고로 저희 마을은 온통 고추밭일 정도로 사내아이 투성입니다.) 난장판을 만들기 일쑤입니다. 어제 저녁 모임의 주제는 세훈이 아버지 살아 생전에 대한 이야기와 이웃 마을 어른이 아이들에게 준 공동 세배 돈을 어디에 쓰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 의논했다고 합니다.(저는 그제 광양 오사모를 진하게 취재한 관계로 중도에 퇴장했습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세상살기
지난해 6월경 열 일을 제쳐두고 짐을 싸고 들어와 평화마을 토목공사를 하고 있을 때 세훈이 엄마를 만났습니다. 사내 아이 둘을 데리고 와 세모자가 살 곳(그때만 해도 황량한 산언덕에 불과했던 땅이었습니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여자, 앞 이마가 쨩구처럼 튀어나온 그가 세현이 엄마였습니다.
난생 처음 집 짓는 일, 이거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완전 뙤약볕아래의 노가다였지요. 물론, 내 집을 짓는 일이었기에 신명난 노동이었지만 여자 몸으로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마을 입주자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했기에 세현이 엄마를 비롯한 여자 분들도 철근을 나르고, 공구리를 치고, 점심을 만들고 오전·오후 참을 만드는 등 한 여름의 노동에 비지땀을 쏟았습니다.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노동, 순천에서 출퇴근(한시간 반거리)하며 일을 해야했던 세현이 엄마는 아이들 학교 보내랴, 생계 이어가랴, 자원노동 의무시간 채우랴 참 분주했습니다. 다른 가정은 형제·부부·자식들이 동원됐지만 세현이 엄마는 근로동원 할 주변 친척이 별로 없었습니다.
거의 혼자 (방학 때 원주와 서울서 조카들이 내려와 노동을 했지만) 노동을 해야 했던 세현이 엄마의 얼굴은 뙤약볕 햇살에 기미가 끼고, 몸은 천근처럼 무거울 텐 데도 늘 얼굴에 웃음을 머금던 두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2년 전, 간질환으로 남편이 세상을 뜨면서 홀로 된 세현이 엄마는 아직도 남편의 채취를 버릴 수 없어 옷가지며 소지품을 고이 간직하고 지낸답니다. 언제 무렵이었을까? 집을 다 짓고 입주한 뒤 세현이 엄마는 결혼기념일 날 남편의 묘소를 찾아갔답니다.
그때 동행한 제 집사람에게 세현이 엄마는 건장했던 남편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몰랐다고 했답니다. 그렇지요. 떠나갈 길 그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담담한 목청으로 남편을 추억한 세현이 엄마, 떠나간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두 아이를 휼륭한 재목으로 키워기 위한 짐(과연 짐인가, 아니면 사명인가)을 떠맡은 세현이 엄마는 한 동안 간병인으로 생계를 이었습니다. 간병인이란 직업이 늘상 적으로 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 한시적 수입원이어서 지금은 인근의 매실농장에서 일용직(일당 2만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달 수입은 50십 만원 가량이라고 합니다.
홀아비 살림은 이가 서 말이고 홀어미 살림은 쌀이 서 말이라고 했던가요? 홀아비 살림보다 홀어미 살림이 낫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쪽이 빈 살림살이, 여자보다 강하다는 어머니로서 아무리 열심히 산다해도 어려운 일은 많은 법입니다.
이삿짐 옮기면서 특히 곤란했던 세훈이 엄마, 홀아비인 진규 아빠, 지용이 아빠와 함께 농을 옮기고 짐을 부리고 커텐 걸 자리에 나사도 박아주고 선반도 만들어 주었더니 한결 시름을 놓더군요. 이사를 마치고 동네 아이들 우르르 데불고 가 전학을 시켰더니 그 빈자리의 허전함이 채워져 걱정이 덜어졌다고 하더군요. 운동회에도 떼지어 몰려가 응원을 했더니 이젠 외롭지 않다고 웃음을 짓더군요.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모두 내새끼란 생각 갖겠습니다
먼데 사는 부모형제보다 이웃 사촌이 낫다고 하지요. 평생 살아갈 이웃인 우리의 세훈이 엄마, 차도 마시고 마실도 다니고, 마을 회의도 함께 하고(세현이 엄마는 마을의 교육·홍보담당이란 중책을 맡고 있습니다), 찬송도 함께 부르고 새벽기도회도 함께 나서는 그래서 든든한 이웃사촌이 있어 살만하다는 세훈이 엄마의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입니다.
아버지란 버팀목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삐뚤어질까?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걱정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키가 훌쩍 큰 세현이가 하동읍내 PC방에 자주 간다고, 고집 센 세원이가 간혹 부정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다고 걱정입니다. 갈 곳 잃어 배회하는 도시의 아이들에 비하면 큰 걱정거리는 아니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걱정은 그렇게 무거운 것입니다.
저희 마을 아이들은 가파른 부모 삶 때문에 상처를 입었던 아이들입니다. 떼지어 놀고 잘고 공부하면서 그 상처가 씻겨지고 있어 다행이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아이들 문제입니다. 남의 새끼 냅두고 내 새끼만 잘 키우면 된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웃집에 불이 나면 내 집은 멀쩡하고 옆집만 타나요.
우리 마을 아이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모두 귀한 내 새끼들이란 생각을 갖기 위해 마음을 다듬고 간섭을 자주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은 호되게 야단치고 어려운 일 힘든 일 함께 나누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잇습니다. 특히 세현이 형제, 엄마 없는 진규, 일년 동안 학교를 중단했던 승규 형제는 유독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이제는 희미해져가는 그 큰 이름을 되찾기 위해 저는 이 마을의 아이들과 다툴까 합니다. 나무랄 놈은 호되게 나무라고, 껴안아 눈물 씻어줄 놈은 품어 안으려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그 따뜻한 품에서 희망이 잉태된다는 사실을 믿고 쓴소리, 잔소리 보태며 이 마을 여자들, 남자들, 아이들과 한 오백년 살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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