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람과 물자들이 몰리는 곳 서울. 그곳까지의 거리는 무얼 기준으로 삼는 것일까. 지방 도로를 가도 고속 도로를 가도 서울까지 몇 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부지기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어디인 지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듯하다. 서울역 광장까지일까 아니면 고속터미널까지의 거리?

서울 세종로 교보문고 앞에 가면 볼 수 있는 조선의 유적 두 가지가 있다.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우뚝 선 이순신 장군상과 교보문고 앞에 정체를 쉽게 알 수 없는 비각이 그것이다. 그 비각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비각 앞쪽에 작은 돌 조각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이는데 '도로원표'라 쓰여 있다. 바로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서울을 기점으로 도로가 시작되는 기분 역할을 하는 표지이다. 즉 '서울까지 몇 km 남았소'하는 말들은 모두 이 곳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도로원표와 함께 있는 그 비각은 무얼 하는 것일까? 도로원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근대적인 개념의 도로라는 것이 일제 시대에 들어와 생긴 것인 만큼 그와 관련해 조선의 애환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유적이다. '고종 즉위40년 칭경기념비'. 비각 안에 자리한 이 기념비는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던 해이자 51세가 되던 1902년에 세운 것으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것과 '황제'라고 칭한 것도 기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비각의 전액은 황태자인 순종이 쓴 것으로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 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송(大韓帝國皇帝寶齡望 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頌)'이라고 쓰여 있으며, 비문은 의정부 의정인 윤용선이 지었으며 당시 육군부장이던 민병석이 썼다. 특히 비각의 앞문 역할을 하는 만세문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떼어내 가정집의 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해방 후 찾아서 복원한 것이다.

한 왕가의 기념 비각 정문이 일반 사삿집의 문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일부 파손되었던 비각은 1954년에 들어 보수한 후 1979년에 완전히 해체한 후 복원함으로써 모습만은 옛 모습 그대로 갖추게 되었다.

대한제국 황체 고종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권세와 대한제국의 위세를 널리 떨치려 했던 것일까. 나라의 힘이 미약하면 고통받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지 고관대작들이 아니었다. 나라가 몰락해가는 망국에 황제 즉위 40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위세 당당한 교보문고 앞의 쓸쓸한 비각이 우리에게 건네는 대화는 무엇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