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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몇 년 전에 대덕연구단지 내의 한 과학기술인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모임은 연구단지 내의 소장, 본부장, 수석/책임연구원급 중견급 연구자들의 모임으로서 한 공학박사 출신의 국회의원을 초빙하여 과학기술에 관한 그의 비전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히 그곳에 모인 참석자들이 속내의 일부를 드러내놓게 되었고, 대부분 과학기술계에 몸담은 것을 후회하는 말 일색이었다. 과학기술을 위해 평생을 바쳐도 보람이 없다는 것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그중 어느 연구소장이 한 말은 압권으로,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늘 그 딸아이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지 않도록 세뇌(?)를 시켜왔다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나중에는 용돈이 궁하거나 야단을 맞을 때마다 “아빠, 그러면 나, 공대 갈 거야”하며 겁을 준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작년 4. 21 과학의 날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는 인터넷 한겨레의 1. 24일자 ‘오늘의 이메일’에 ‘대덕의 박사아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 ▲ 대덕단지 내 대덕과학문화센터 전경 ⓒ 대덕과학문화센터 |
“아빠, 그러면 나, 공대 갈 거야”
모두 웃었지만 그것은 탄식이었고, 나에게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나 역시 공학을 전공한 것이 뼈저리게 후회된다고, 그리고 자식들은 과학기술계로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평소에 말은 안 하지만 모두 저마다 하나씩 이 사회에 대한 섭섭함을 품고 있는 듯 했다.
필자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1991년이었다.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낀 것은 우리 사회가 그 몇 년 사이에 확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사회 분위기에서 이공학 분야의 고급인력이 경시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의 자부심과 의욕이 시기에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다. 유학을 가기 전엔 사회를 위하여 공헌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긍지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유학 갔다 돌아온 후의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로 변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단 몇 년만에 온 변화였다.
한동안 마음이 편치 못 했다. 그 당시 전직을 생각한 때도 있었다. 변리사 시험, 사법시험, 한의대 입학 고려 등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필자는 10년 전에 이미 경험을 했다. 그러다가 94년 대덕연구단지로 오게 되었다.
대덕연구단지가 어떤 곳인가? 4천여 명의 박사학위 소지자가 있는 고급두뇌 도시 아닌가. 무언가 이상했다. 풀죽은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공계열의 박사는 수천 명이 있어도 사회를 움직이지 못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이공계인의 위상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이곳 대덕연구단지는 나에게 제공하였다.
2. 본질진단
최근 수능시험 응시학생의 계열별 지원현황을 보면 4,5년 전만 해도 40% 가량이 유지되던 자연계열 응시자 비율이 2001 학년도에 29.5%, 그리고 2002학년도엔 27% 정도로 집계되었다 한다. 자연계열 지원학생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그나마 자연계열을 지원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많은 우수학생이 의대, 치대, 한의대 등 경제적 부가 보장된 의료 전문직종에 몰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과학기술을 경시하는 사회풍조가 학생들의 진로선택에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탄탄한 기술력으로 세계와 경쟁해야 할 우리나라의 앞날을 생각할 때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는 수능이 쉽게 나올 것이라는 보도가 있자, 이공계열 학생들이 대거 학교도 휴학하고 재수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이제 ‘이공계기피 현상’을 넘어 ‘이공계로부터의 엑소더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공계 기피’에서 ‘이공계로부터의 엑소더스’로
그러나 필자는 담담할 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오래 전부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그런 것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마치 밥그릇 챙기기로 비칠까 구차스러워 입을 닫고 있었을 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대덕연구단지의 그 기관장이 자식은 자기가 살아온 길로 보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세뇌를 시작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온 이 사회의 과학기술자 홀대 분위기 속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렵게 공부해봐야 비전이 없다는 것이다. 비전이 무엇인가. 경제적 처우 (과학기술자들이 부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큰 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지위, 긍지, 보람 같은 것들이 한데 뭉뚱그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공계로 진출했을 때 이 중 무엇이 돌아오는지를 생각해보면 현상은 눈에 보인다.
조사에 따르면,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원인으로 '수학, 과학이 공부하기 어렵다'는 것과 '부모들도 자식들이 공부하기 힘든 이공계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한다'가 단연 상위에 꼽혔다고 한다(물론 이는 이공계 기피 원인의 일부일 뿐이다).
수학, 과학이 예전엔 쉬웠는데 지금은 어려워진 것인가? 아니다. 예전에는 그런 어려운 공부하면서도, 이공대 가는 것이, 그리하여 과학기술자가 되는 것이 자랑이고 보람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에 공헌을 하고 있다는 나름대로의 긍지와 보람이라는 것이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공계로 간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그나마 남아 있던 긍지와 보람조차도 느낄 수 없는 사회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비슷한 노력으로 갈 수 있는 의료계열 졸업자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너무 커져버려 상대적인 박탈감을 심하게 느껴야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비전의 요소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필자에겐 이것이 문제의 핵심으로 보인다. 지금도 어려운 공부해서 과학기술자가 되더라도 안정된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사회적으로 지위 높고 존경받으며 보람 또한 있다면, 우수한 인재가 왜 안 가겠는가.
'비전'이 보이지 않는 과학기술인
지금 과학기술인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으며 그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과학기술인들은 3공화국 이래 사회에의 공헌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IMF 이후에는 연구원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 과학기술자들이란 그저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소모품쯤으로, 재주나 부리는 곰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과학기술계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취임 초 김 대통령은 KIST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30여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과학기술계는 환영했다. 순진한 과학기술계는 그만한 일에도 감동하였고 사기가 올라가는 듯 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과학기술 대통령이 되겠다던 말도,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승격시키겠다는 것도, 과학기술자라는 것이 명예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던 말도 결국 한 때의 수사에 그친 것이 되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출신 분야가 너무 사회과학분야에 편중되어 있다. 과학기술인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 국회의원 중 이공계 출신 의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3%대에 머무르고 있으며 의약, 이학 등 자연계열 출신 의원을 포함해도 10%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이 그것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문과인 위주의 국정운영에서 탈피를
그리고 전체 관료 중에서도 기술관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적은 데다가, 기술고시출신들은 국장급을 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5급 이상의 고위관료 중 기술관료는 16% 정도, 4급 이상 11%정도, 3급 이상 7%정도로, 위로 올라갈수록 기술관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줄어든다.
당연히 기술관료로 보직해야 할 자리에도 복수직이라 하여 행정직이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고 게다가 행정직 우대 풍토가 팽배하여 기술관료들은 일찍 도태되어 버리고 만다. 가히 행정가의 세상이라 할 만하다.
아무리 주변국을 둘러보아도 과학기술인이 이토록 국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는 나라는 없다. 북한, 중국, 일본 모두 과학기술인이 어느 정도의 지분(?)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학생들이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진다는 측면에서 당연한 것이다. 특히 중국은 최고위 상무위원 7명중 6명이 이공학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장쩌민 주석이 상하이 교통대 전기공학 전공자이며 주룽지 총리 또한 칭화대 전기공학과 출신이다. 중국의 수뇌부 진용이 이처럼 과학기술인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는 19세기 과학기술 혁명에 유럽에 뒤져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결과이다. 비슷한 식민지 경험을 했던 우리나라가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아직도 사농공상 주문을 외우는 현실과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북한도 과학기술 우대정책으로 많은 테크노크라트가 포진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의회에도 일정 수의 과학기술인이 진출하고 있어 정쟁 중에도 과학기술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사농공상의 빛나는 정신을 이어받아 행정하고 법 공부한 사람들의 천국이 되어있다.
3. 대책
얼마 전 정부는 논란이 되고 있는 고등학생의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그 추진전략에는 '청소년 과학교육 내실화', '과학영재교육과 과학고등학교 운영정상화', '이공계 진학지도 개선' 등이 들어 있었는데, 그 대책이라는 것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대책이란 것이 모두 일부 학생들에게 단기적인 유인책은 될지언정 장기적으로 이공계 기피현상을 없앨 수 있는 대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공계대학 기피현상은 몇 개 부처의 관료가 모여 대책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한참이나 잘못 파악한 것이다. 정부관료들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만큼 뿌리깊은 문제라는 것이다.
대책을 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을 정확하게 짚는 것이다. 그러니 대책은 앞서 말한 ‘부, 사회적 지위와 존경, 긍지와 보람과 같은 비전의 요소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지금 대부분의 과학기술인, 심지어 과학기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조차도 "내 자식은 절대로 이공계열로 안 보낸다"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내 자식은 절대로 이공계열로 안 보낸다"
그러니 왜 일반인조차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과학기술인들이 나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에도 정당한 대우를 받기는커녕 그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런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문제풀이는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학기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 그리고 더 나아가 생존에 관련된 문제다. 과학기술인만의 밥그릇을 키우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파이를 더 이상 쪼그라들지 않게, 아니 더 크게 하고 그럼으로써 모두에게로 돌아가는 몫을 크게 하자는 것이다. 과학기술인이 목소리를 내는데는 명분이 있다.
그리하여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대책이란 것을 아래에 열거해 본다.
첫째, 지금의 이러한 과학기술의 위기적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조치가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우선 과학기술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챙긴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나 우리의 대통령들은 그러지 못했다. 국가발전의 메카니즘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는 3공화국 이후 잊혀진 분야로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이나마 굴러올 수 있었던 것은 과학기술을 발판으로 경제 도약을 꾀했던 3공 시절에 뿌린 씨 덕이 아닌가 싶다. 과학기술인들의 사기가 이렇듯 저하된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는 최고통치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청와대에 과학기술 수석비서실을 설치하여 대통령의 의지를 집행하고, 과기전략 수립, 정책종합조정, 집행의 리더역을 맡기는 것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고 의지가 있어도 현실적으로 일일이 신경을 쓰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과학기술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이것이 과학기술 수석비서실인 것이다.
지금처럼 경제수석 비서실의 한 귀퉁이에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일에 힘도 실리지 않는다. 따라서 청와대 과학기술 수석비서실의 설치는 이공계기피 현상 해결을 비롯하여 국가경쟁력의 제고 등 주요 과학기술 관련 과제해결의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셋째, 과학기술인 스스로의 의식구조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봉건적인 사농공상의 의식구조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인은 스스로를 중인으로 비하하며 사회참여에 소극적이다. 사회의 구성원이며 그것도 비중이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자격과 능력이 충분한데도 담을 쌓고 있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 부류를 누가 존중해 주겠는가. 이러니 과학기술인의 설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과학기술인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안이하게 생각하고 누군가 대신 나서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사회에 공헌하는 만큼 사회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뒷자리에 처져있는 것도 결국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인의 각성은 이 시점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누구도 대신 쟁취해주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피 흘려 쟁취한 역사이듯, 과학기술인의 명예회복과 위상제고가 당위라면 적어도 목소리를 낼 용기는 있어야 한다.
넷째, 우수한 인력이 과학기술 분야로 지망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우리 사회같이 권력의 끄나풀이라도 쥐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비효율적인 법과 행정 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여건에서 참으로 어려운 얘기이나 과학기술인에 대한 명예회복과 사기진작 그리고 인센티브를 통하여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인 중에서도 유명 정치인이라든지 스타가 나와야 한다. 젊은이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라든지, 야후의 제리 양 같은 스타 과학기술자가 우리나라에도 많이 나와야 한다.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지난 1997년 8월 “백악관 천년계획( Millennium Program)" 이라 명명된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의 연설문을 보면 ”20세기는 미국인의 세기였으며 미국인의 정신이 전 세계인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쓰고 있다. 화성에 무인탐사선을 성공적으로 착륙시킨 이야기도 나온다.
그 연설 내용 중에 눈에 띄는 것은 교육과 과학기술에 관한 그의 강한 의지이다. 2000년까지 전 미국내의 모든 학급과 도서관을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연방과학재단을 중심으로 과학, 엔지니어링 그리고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거국적 캠페인을 벌이며 젊은이로 하여금 과학의 길로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서도 아직도 대통령이 직접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과학, 수학 그리고 엔지니어링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호소하며 젊은이로 하여금 과학의 길로 유도하겠다고 하는 마당에, 이제 국민소득 겨우 1만 불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듯 오만을 부리고 있다.
이런 무지스러움은 미래에 재앙을 불러올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 늘상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아니 아무리 우리나라가 발전을 했다 해도, 결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행진을 멈춰서는 안 된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힘을 보유하고 있는 이웃 일본은 아직도 과학기술입국을 외치고 있는 마당에 우리가 이렇게 게으름을 피워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주변에 호랑이, 사자와 함께 살고 있다. 평화시엔 늘 까먹는 사실이지만 평화시에 제몸 지킬 힘을 배양해 놓아야 한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그 역사는 반복되게 마련이다.
다섯째, 과학기술의 대중화를 진행시켜야 하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조성하여야 한다. 우리나라가 황무지에서 세계경제 규모 13위의 나라로 도약하게 된 배경에 과학기술이 있었다는 것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대국민 홍보를 강화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는 여론매체에서도 과학기술 전문언론인을 양성하는 등 언론이 먼저 깨어야 한다.
여섯째, 국회의 과학기술 전문성 제고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자들이 선거를 통해 국회에 들어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만큼 각 정당이 과학기술 전문가에게도 직능대표 의원직 문호를 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회의원, 정치인들은 생산하는 것 없이 허구헌 날 정쟁질만 하지말고, 정신차려서 과학기술에도 신경을 좀 써야 할 것이다. 우리 과학기술 종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다. 과학기술인들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못난 정치(인)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이 피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그 국민 안에는 정치인 그들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그들의 잘못으로 그들도 피해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이 과연 알기나 할까?
일곱째, 기술고시를 확대하고 전문기술관료의 고위직 기용을 확대하여야 한다. 지금은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기술직은 도태되어 기술직 공무원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기술직은 마치 관리경영 금치산자인양 문과 출신들은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기술직이 관리직을 수행할 경우, 기술을 바탕으로 오히려 그들보다도 더 폭 넓고 과학적인 사고로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애써 눈감고, 정책적으로 기술직이 올라갈 수 있는 소지를 없애 놓은 것이다. 기술관료에게도 능력이 있으면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이렇듯 이공계 기피현상 형성에 가장 선봉에 서있는 정부가 이공계 기피 현상을 타파하겠다고 정책을 내놓는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정부 스스로 먼저 이런 잘못된 관행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 전반에 걸친 과학마인드와 창의력의 확산이며,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인들이 다시 뛸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4월 13일(토)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에서 주최한 "'이공계 위기론'의 본질과 대책" 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며, 하니리포터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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