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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준비 철거민 아주머니들이 집회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준비하고있다.
저녁준비철거민 아주머니들이 집회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준비하고있다. ⓒ 박현주
지난 18일 주택공사의 강제철거 후 쫒겨난 용두동 주민 46명은 대화동 빈들교회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다. 집회를 마치면 예배당과 어린이 공부방, 회의실 등에 교회에서 마련해준 이불을 깔고 피곤한 몸을 뉘인다.

무너진 집터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이들은 3차 강제철거 때 주택공사 측에서 천막까지 철거해버려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대전지역 통일문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21일 일요일 밤, 지친 몸으로 때늦은 저녁 준비를 하는 철거민들을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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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잘 살았는데, 내일이 걱정"


▲ 인터뷰1 : 김화순(64세·여)

김화순 아주머니
김화순 아주머니 ⓒ 박현주
- 오늘은 어디에서 집회가 있었나요?
"으능정이에서 있었지요. 5시에 시작했어요."

- 용두동 집은 몇 평이었나요?
"7평이었지. 보상가는 700만원이야."

- 언제부터 용두동에 살았어요?
"1970년도에 용두동에 정착했지요. 선화동에 있는 모자원(불우가정 보호시설)에 살다가 들어왔지. 처음엔 전세 살다가 돈을 모아 샀지요. 나는 30세에 과부가 되었어요. 그때 우리 애들이 10살, 7살, 5살, 4살이었는데, 이 집에서 다 키워서 시집 장가보내고 이제 혼자 편하게 살려고 했는데... 그 동안 식모일, 청소일 등을 하며 근근히 살았어요."

- 7평에 어떻게 5식구가 살았어요?
"(웃음) 밤중에 화장실 다녀오면 내가 누울 곳이 없어져. 그래서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도 했어요."

-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해요?
"서대전사거리에 있는 병원에서 청소일을 해서 70만원씩 벌었는데, 집 뜯기고 나서 싸우러 댕기느라 그만뒀어. 지금은 큰딸이 5만원씩 줘. 우리 애들도 가난해. 내가 많이 못 가르쳤거든. 이 일(용두동 투쟁) 끝나면, 다시 일 다녀야 해요."

- 가장 억울한 것은요?
"좁지만 40년 동안 내 집이라 맘편하게 살았는데, 돈 700만원에 나가라니. 이런 일이 어딨어? 통장이 인구조사한다면서 도장받으러 다녔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주거환경개선 사업에 찬성한다는 표시였대요. 나가라면서 공청회 한 번 한 적이 없어요. 공청회라도 했으면 절대로 속는 일 없었을 거예요."

- 강제철거때 다치셨어요?
"내가 젊어서부터 잠 못자며 일하다가 골병이 들었어요. 근데, 늙어서 3번이나 젊은 놈들한테 맞고 철거반놈들이 팔을 뒤로 꺾는 바람에 오른쪽 팔을 못쓰겠어요."

- 소망이 있다면요?
"무상입주권 받는 거야. 그 동안 내 집에서 눈치안보고 살았는데... 늙어서는 세 못살아. 난 돈도 필요없어요. 그저 집이 있으면 돼요."


▲ 인터뷰2 : 박정순(68세·여)

실명 위기의 박정순 아주머니
실명 위기의 박정순 아주머니 ⓒ 박현주
- 오른쪽 눈은 왜 다치셨어요?
"(지난 18일) 철거반에게 맞았어. 눈에서 뭐가 내려오는 것 같고,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검사 결과 나와야 알겠대. 지금도 하나도 안보여."

- 집이 몇 평이었어요?
"7평. 보상가는 700만원 나왔어. 땅은 학교땅이고(호수돈여고) 집은 내 집이었지."

- 언제부터 살았어요? 고향은요?
"40년 넘게 살았어. 고향은 옥천인데, 먹고 살려고 대전에 일자리 구하러 나왔지. 5남매를 용두동에서 키웠는데... 지금은 다 결혼해서 나가 살고, 나 혼자 살지."

- 왜 자제분들 집으로 가지 않나요?
"애들도 다 저 살기 바빠. 아들은 노동일하고... 애들도 다 사글세 살아. 내가 들어갈 집이 있어야지."

- 그 동안 무슨 일을 하셨어요?
"아파트 청소도 하고, 작년까지는 공공근로를 했어. 지금은 그것도 못하고..."


▲ 인터뷰3 : 김종순(47세·여)

- 몇 평에 살았어요? 보상가가 얼마였어요?
"(옆에 있는 박정순 할머니를 보며) 쭉 똑같은 집이에요. 7평 살았는데, 690만원 나왔어요. 집은 내 집이고, 땅은 학교 땅이고."

- 몇 식구가 살았어요?
"4식구요. 아들이 얼마 전에 제대했는데 서울로 가고, 우리 아저씨가 막일해서 먹고 살아요."

- 철거 때 안다치셨어요?
"옥상에 있다가 붙들렸죠. 머리도 때리고 (철거반이) XX년이라고 욕했어요. 돌로 다리를 맞았어요."


▲ 인터뷰4 : 이팔섭(61세·여), 이팔순(66세·여) 자매

상처를 보여주는 이팔섭 아주머니
상처를 보여주는 이팔섭 아주머니 ⓒ 박현주
- (약을 챙기는 이팔섭 할머니를 보고) 어디 다치셨어요?
"(3차 강제철거 때) 지붕에서 떨어진 학생을 (철거반이) 군홧발로 짓이기는 걸 보고 똥탄을 던졌더니, 그 놈들이 올라와서 돌로 다리를 치고 팔을 꺾었어. (상처를 보여주며)"

- 언제부터 사셨어요? 집이 몇 평이었어요?
"13년 동안 살았어. 우리 집은 총 31평이었는데, 땅값하고 건물값 다 포함해서 2790만원 나왔어. 평당 90만원이래. 1996년도에 형편이 어려워서 우리 언니(이팔순씨)한테 평당 150만원에 30평을 팔았는데... 어떻게 더 떨어질 수가 있어... 얼마 전에 구청에서 도로 낸다고 보상해줄때에도 평당 220만원이었어. 내가 처음에 여기 땅을 살 때보다도 더 싸게 매겼어."

- 지금 심정은?
"억울해서 못살겠어. 주택공사놈들, 대전시 놈들 순 도둑놈들이야. 헐값에 땅과 집을 빼앗아가는 놈들이야. 늙어서 집없이 어딜 돌아다니겠어. 집이 있어야해."

- 자식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들이 병난다고 만류하지. 그런데 아들집엔 못들어가. 셋방을 살 거든."


▲ 인터뷰5 : 김용림(66세·여)

허리가 아파..
허리가 아파.. ⓒ 박현주
"(기자를 보더니 다가와서)우리집이 맨처음에 뜯겼어. 3월에... 집 뜯긴후에 대학병원에 입원했었어. 깡패들이(용역철거반원) 자동차 사이에 나를 밀어넣고 못나오게 했어. 그래서 숟가락 하나 못가지고 나왔어."

- 몇 년간 사셨어요? 보상가는 얼마였나요?
"23년 동안 살았지. 7평 살았는데, 500만원 준대. 그 돈으로 어딜 가. 자식들 다 키우고 이제 살 만하니 이 지랄을 해."

- 철거 후 어디서 살았어요?
"선화동 큰 아들네 있었지. 한방에서 3명이 자야하니 원 불편해서..."

- 주택공사에서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가라는데, 왜 반대하시죠?
"내 집에서 사는 게 맘 편하지. 20년 안에 아파트를 사야 한다더군. 그 동안 돈을 못벌면 어떡해. 나 아는 사람은 5년만에 쫒겨났대. 난 내 집을 원해요. 눈치 안보고 살 내 집을."

- 왜 개발에 찬성하셨죠?
"난 도장 안찍었어. 통장이 인구조사 하는 거 마냥 가장해서 사람들 도장 받아갔어."


▲ 인터뷰6 : 김규동(70세·여)

웬만하면 늙은이가 이러겠어?
웬만하면 늙은이가 이러겠어? ⓒ 박현주
- 용두동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죠?
"그 집에(용두동) 살 때 못먹고 못입었어도 재미나게 살았어요. 아들딸 잘 여의고... 세금도 많이 안나오고 해서 걱정없이 살았는데... 없는 사람 살기에는 좋은 곳이야. 교통 편리해서 어디든 일 다닐 수 있고. 그 보금자리를 왜 망쳐놓느냐 말야. (집) 뜯긴 날 기막혀서 막 울었어. 지금도 (신경)안정제 먹어야 해. 사람들 웅성대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컹거려서."

- 철거때 경찰이 있었나요?
"경찰이 도대체 뭔 필요가 있대요? 뒷짐지고 학생들 주민들 맞는 거 구경만 하고 있었어요. 철거반놈들이 학생을 인정사정없이 패는데 질려서 (내가) 지붕 위에서 놈들한테 똥을 던졌어요. 그랬더니 그 새파랗게 젊은놈이 던지지마 xx년아 그러는 거야. 학생들 맞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고만 때리라고 그랬더니 똥 안던지면 안때리겠대. 그래서 안던졌더니 바람처럼 지붕 위로 올라와서는 나를 끌어내렸어."

- 가장 억울한 것은요?
"내가 거기서(용두동) 40년을 살았어. 고향은 옥천인데, 자식들 가르치려고 나왔어. 그 동안 건축일(못빼기 등)하면서 살았어. 근데 보금자리를 그렇게 부셔유? (아들집에 가면) 며느리랑 어떻게 한방에 자나. 난 29평 건물에 땅도 내 거였어. 근데 1800만원 나왔어. 늙은이가 어지간하면 (주민투쟁)그만둘텐데 그 돈으로 어딜 가나."


▲ 인터뷰7 : 박춘옥(58세·여)

- 언제부터 용두동에서 살았어요?
"14년 되었어요. 살기 힘들어 사글세 살다가 15평을 샀어. 모아서 25평을 더 샀지. 그래서 방 6칸에 집을 40평 내 땅에 지어서 살았어. 근데 평당 80만원에, 도로 날 곳은 평당 270만원해서 총 5000만원 나오더군."

- 그 동안 무슨 일을 하셨나요?
"섬유공장에서 20년간 일했어. 아들딸 힘들게 키워 다 외지로 보냈어. 이번에(18일) 뜯길 때까지 혼자 살았어."

- 생가였군요.
"응. 철거들어오는 거 잘 몰랐는데... 그 전날 사람들이 웅성대고 해서 알았어. 포크레인 들어올 때 지붕 위로 올라갔지. 철거반놈들이 슬레이트를 막 던져서 맞았어. 그래 학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줬어. 그랬더니 이 놈들이 학생들을 마구 패는데... (한숨) 학생들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못보겠더라고. 깡패놈이(용역철거반원)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갔지. 문을 부수고 가래. 몇 걸음 걷다가 쓰러졌는데, 그후로 기억이 안나. 일어나보니 병원이더군."


▲ 인터뷰8 : 이순희(47세·여·조야연 주민비상대책위대표 부인)

- 면회 가셨어요? (조야연 대표는 지난 16일 업무방해죄로 대전교도소에 구속수감되었다.)
"네. 5분 동안 보았는데, 눈물만 흘리고..."

- 철거당일날 수모를 겪지 않으셨나요?
"안 그래도 내가 주민대표 부인이라 겁났었어요. 나는 우리 천막 근처에 있었는데,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철거반놈들 17명이 뛰어오더니 내 옷을 잡고 천막 안으로 끌고 들어갔어. 밖에 있던 학생을 워커발로 차는데, 이건 사람이 아냐. 내가 고만 때리라고 소리질렀더니, 목을 발로 쾅 밟아 누르고 어떤 놈이 쇠꼬챙이 같은 걸로 허벅지를 찌르며 이렇게 말했어요. '니가 대표 마누라지? 한번만 더 소리지르면 xx같은 니년 똥구멍을 찔러버리겠다'고. 그래서 너무너무 무서워서 한마디도 못했어요. 거기서 대답을 하다가는 진짜 찌를 것 같았어요. 철거반들 날뛰는 걸 봐서는 한 사람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오월 광주가 따로 없었어요."

- 왜 용두동에서 주민투쟁을 하시나요?
"이렇게까지 힘들 줄 알았으면 아마 남편을 말렸을 거에요. 근데 지금은 포기 못하겠어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요. 주거환경개선사업에 찬성했던 개발추진주민위원회에서 조작하다시피하여 도장을 받고 다녔지요. 집이 헐린 후 500-1000만원 푼돈을 받고 나간 사람들은 지금쯤 거지된 사람 많을 겁니다. 돈이 다 떨어질 때이니까요. 주거환경개선사업은 없는 사람 등쳐서 주택공사 돈벌어주는 일입니다.주택공사 직원 말이, 우리더러 양로원 가라, 지금껏 돈 안벌고 뭐했냐 그럽디다."


▲ 인터뷰9 : 안동양(77세·남)

피난민 수용소때 살았다는 안동양 할아버지.
피난민 수용소때 살았다는 안동양 할아버지. ⓒ 박현주
- 할아버지, 언제부터 살았어요?
"나는 45년간 살았어. 용두동은 처음엔 6.25피난민 수용소였지."

- 보상가는 얼마에요?
"7평에 80만원씩해서 560만원 나왔어. 우리 집은 무허가 판자집이라 건물값은 따로 안나왔어. 이 돈 받고 나가서 뒈지라는 소리지. 6.25때 이승만이가 지어줬는데, 어떻게 무허가가 됐는지 모르겠어. 나중에 피난민들이 한 채에 300만원에 팔았어. 그래서 샀는데... 그런데 시청에서 또 불하받으라고 해서 또 샀어. 2번 산 거야."

- 자제분들이 모셔가지 않나요?
"자식들도 저 벌어먹고 살기 힘들어. 나는 지금껏 아파트 청소하며 한 달에 30만원씩 벌어서 혼자 살았어. 생계비 지원도 조금씩 받고..."

- 집이 철거된 후 어디서 사셨어요?
"천막에서 살았지."


▲ 인터뷰10 : 손학준(81세·남)

다혈질의 손학준 할아버지
다혈질의 손학준 할아버지 ⓒ 박현주
- 철거당일날 하루종일 호통을 치셨죠?
"응. 억울해서. 나는 30년간 용두동에서 살았어. 땅도 사고 집도 사고. 대지 23평에 건평이 16평이었는데, 땅은 2400만원 쳐주고, 건물은 1800만원 쳐주더군. 우리 집은 나무가 많았는데, 귤나무, 동백나무, 주목, 연산홍... 마당도 있고 뒷뜰엔 정원도 있는 집이었어. 가장 억울한 건 어째서 민주사회에서 절차없이 이런 일이 일어나느냔 말이야. 인구조사 가장해서 주거환경개선사업 찬성 도장 받아가서는 공청회도 한번 없고. 개발추진위 대표 홍아무개 놈이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그놈은 같은 땅인데도 3억1천800만원을 받아챙겨서 나갔어."

- 무엇이 가장 힘드세요?
"힘든 건 말로 다 할 수 없어. 전세값도 안주고 나가라니... 적으나 크나 내집에서 살았는데, 며느리 얻으면 2층 올려서 방도 내주고 했는데... 세상에 돈 500만원주면서 나가라니 그게 말이 되나. 내 처지보다는 그렇게 쫒겨나는 사람들이 너무 안됐어."


▲ 인터뷰11 : 이옥희(44세·여·임시주민대표)

- 오늘 연설(대전지역 통일문화제에서 철거민 대표 연설)할 때 철거민들이 많이 울었다는데요.
"네... 제가 우니까 다들 따라서 울대요."

- 앞으로 어떻게 싸우시겠습니까?
"현장을 사수해야죠. 포기 안 할 거예요. 인간대접 못받는 게 가장 억울해요. 우리는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어요. 우리가 이런 수모를 당하는 마지막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옥희씨 인터뷰를 끝내자 철거민들은 불을 끄고 하나둘씩 눕기 시작했다. 천장의 선풍기가 느릿느릿 돌아가며 더위를 쫒고, 갈증과 피로에 지친 주민들은 교회계단에 앉아 바람을 쐬었다. 그들 머리 위로 붉은 십자가가 빛났다.

ⓒ 박현주

덧붙이는 글 | 대전지역철거민 공동대책위원회(준)에서 철거민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식량과 옷, 생필품도 부족합니다. 뜻있는 분들의 도움부탁드립니다.

임시 연락처: 전화)042-621-8891(빈들교회) Fax) 042-621-8890
농협 453027-51-014260 예금주: 이옥희

●공동대책위원회 참여단체●
대전지역 건설 노동조합, 대전충남 녹색연합, 새날 나눔터, 대전 실업극복시민운동협의회,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 협의회, 참 사랑 일꾼회, 노점상 연합회 대전지부, 대전 노동자회, 사회당, 늘푸른 노동자 학교, 대전지역 학생 연석회의, 대전 충남 연합. 민주노총 대전 지역본부, 민주 노동당, 전국 철거민 연합회, 대전NCC 인권 위원회, 대전 NCC 사회 환경 위원회, 빈들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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