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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드럼에 미친 아이

나는 요즘 이른 새벽에 이따금 그로부터 인사를 받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남궁연이에요. 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열심히 살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모두 정상에서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저 그 동안 열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선생님도 작품 열심히 쓰세요. 그럼 또 뵐 게요."

막 배달된 신문을 펼치면 전면 광고에 민둥머리의 그가 드럼을 배경으로 전자 악보를 펼쳐 놓은 채 드럼 스틱에 턱을 받치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자 싱긋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메가매니아 남궁연 '최고는 다릅니다'라는 카피가 있다.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나 보다. 고1 생활 훈련 때 촌극 시간이었다. 한 녀석이 그에게 마이크를 갖다대고 좋아하는 선생님을 물었다.
"저는 나사못이 약간 빠진 듯한 박도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그는 재치 있는 말솜씨로 친구들의 배꼽을 잡게 했던 까까머리 학생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끼가 보였다. 돈만 생기면 레코드판을 사서 밤낮으로 음악 감상에 심취하면서 드럼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그는 음악에 빠져 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공학도가 되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수 없어 고2 때 자연계를 선택했으나 머릿속에 수학 공식이나 과학 이론이 배어들지 않았다. 그는 학업에 흥미도 잃었고 학교생활도 싫어졌다. 아버지의 강요에 더 이상 순순히 승복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나'와 아버지가 생각하는 '아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10대의 반항이, 방황이 시작됐다. 자연 학교생활이 뒤틀려지고 마침내 학교로부터 '집에서 당분간 푹 쉬라는 조치'(그의 표현임)도 내렸다. 다시 학교로부터 등교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고 인문계로 전과를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 임소혁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한 결과, 하나님의 계시는 '네 길로 가라'였다. 그 후 그는 드럼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두들겼다. 대한민국에서는 제일가는 드러머가 되겠다고 드럼에 미쳤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이도 없었고 수중에는 무일푼이었다. '네가 크게 되려고 일찌감치 고통을 받나 보다'고 하며 끝까지 용기를 주시던 어머니가 암으로 쓰러졌다.

그날 그는 세수를 하다가 세숫대야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몰골이 너무 한심하고 보기 싫어서 그날로 머리를 박박 밀었다. 이상하게 그날부터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삭발 승처럼 민둥머리로 지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겠다고 한다. 그는 지금 방송가에서 DJ로 VJ로 탤런트로 종횡무진 누비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컴퓨터에 빠진 아이

나는 컴퓨터 오락을 매우 좋아합니다. 중3 때부터 고1 겨울방학 때까지 컴퓨터 오락에 아주 미쳤습니다. 내 머리 속에는 온통 오락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학교생활도 엉망이 되고 건강도 나빠져서 키도 제대로 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엄마랑 사이도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내가 방에서 오락을 하고 있으면, 갑자기 엄마가 와서 컴퓨터를 꺼 버립니다. 나는 저장도 안 시켜놓았는데 엄마가 막무가내로 꺼 버리니까 무지하게 열 받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엄마한테 막 대듭니다.

그러자 엄마가 나를 보고 제 정신이 아니라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엄마가 아들을 환자 취급을 하니 나는 세상을 살아갈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살아야 했습니다. 내가 살고자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역시 오락이었습니다. 오락을 쉴새없이 하다보니 엄마와의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오랜 싸움 끝에 내가 지쳐서 지금은 오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달 정도 됐는데, 앞으로 어떨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컴퓨터 오락을 한 후부터는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밤참을 먹고자 라면을 끓이다가 그 사이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서 오락을 한다는 게, 가스불을 켜 놓은 채 4~5 시간 정도가 지나가 태워 먹은 냄비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어느 날은 집까지 화재로 날릴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밤을 새우시피 오락을 즐기다가 등교 길에 버스나 지하철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가 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버스 번호를 착각해서 신촌이 아닌 영등포로 간 적도 있습니다.


작문 시간 '말하기' 발표 때, 한 녀석의 이야기이다. 그 녀석이 발표할 때 아이들이 책상을 치며 재미있게 들었고, 나도 마치 네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빙긋 웃었다.

너무 닦달하면 집 밖으로 나돌아요

사람은 저마다 길이 있다. 혹자는 그것을 팔자라 하기도, 운명이라고 한다. 그 길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들은 자녀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부자간에 갈등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들아, 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는 당시로는 큰돈을 들여 컴퓨터를 사다주었다. 그때부터 너는 컴퓨터에 홀딱 빠져 버렸다. 네가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여전히 컴퓨터와 살다시피했다.

그러자 네 학업 성적이 점차 하향 곡선을 그었다. 나는 네 성적표를 볼 때마다 '그래도 네 밑에도 몇 녀석 있구나'라고 호기를 부렸지만, 네가 너무 컴퓨터에만 빠진 것 같아 몹시 걱정이 됐다. 엄마는 보다 못해 네 방의 컴퓨터를 거실로 옮기고, 그래도 안 되니까 코드를 뽑아 내 방에 두었다.

하지만 너는 포기를 하지 않고 부모가 잠들기만 기다린 후, 한밤중에 몰래 내 방으로 들어와서 코드를 꺼내간 뒤 다시 자판을 두들겼다. 네가 컴퓨터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나자 학교 선생님들이 너도나도 일감을 맡겼다. 학급 환경 미화도, 선생님의 연구 수업 교안도,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도, 청첩장도, 별별 일감을 다 가져 와서 밤 새워 두들겼다. 때로는 시간에 쫓겨 후끈 단 한 선생님은 밤중에도 예고도 없이 우리집을 찾기도 했다.

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자제할 줄 알았는데, 입학 후 아예 클럽 활동 전산반으로 들어갔다. 축제다, 교내 행사다 하며 꼬박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2학년이 되자 전산반 반장이 돼 더욱 학교 행사에 극성을 부렸다.

엄마는 너와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엄마가 포기해 버렸다. "너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못 가면 곧장 용산 전자 상가에 점원으로 취직하는 거다"라고 다짐까지 받아 두었다. 나도 밤 새워 두들기는 자판 소리에 네 방으로 가서 몇 번이나 야단쳤으나, 끝내 네 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엄마가 나에게도 포기하라고 했다.

"너무 닦달하면 집 밖으로 나도니까 내버려 두세요."
엄마 말이 일리가 있어 나도 욕심을 버렸다. 부모와 갈등을 빚어 집 밖으로 떠도는 청소년들이 부지기수로 많은 걸 익히 알고 있지 않는가.

"아버지도 글 쓰는 일이 좋아서 밤을 새우시지요. 글이 잘 풀려 신나게 쓰고 있는데 불 끄고 자라면 좋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 네 인생은 네 것이니까…… 일찌감치 전자 상가에 나가 자립하는 것도 더 나을 지도 몰라. 어차피 다가오는 세상은 대학 졸업장이 별 볼 일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 마음도 한결 편했다.

ⓒ 임소혁
후회 없이 살아가기를

나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글은 꼭 육필로 쓴다고 고집을 피웠다. 내 필체에 영혼을 불어넣는다는 심정으로 꼭 만년필로 정성껏 썼다. 워드로 글을 쓰는 친구들이, "한번 배워 봐, 아주 편하고 좋아"라고 권해도 묵살하고 컴퓨터 자판 한번 두들겨보지 않았다.

나는 장편 소설을 쓸 때, 글을 너무 무리하게 써서 팔에 통증이 심해 여러 달 동안 한방 병원에 가서 침을 맞으면서도 만년필만 고집했다. 그러다가, 학교 선생님도 필수로 워드를 칠 줄 알아야 된다는 통보를 받고, 원고를 청탁한 잡지사로부터 원고를 디스켓이나 메일로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 어쩔 수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워드를 정식으로 학원에 등록해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우자니 모르는 것도, 실수도 무척 많았다. 그때마다 너에게 물었다. 몇 번은 잘 가르쳐주던 네가 자꾸만 부르니까 짜증이 났는지, 아니면 지난날 네 마음대로 자판을 두드리지 못하게 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아빠, 모르신 것 적어두셨다가 한꺼번에 물어 보세요" "이 책 보시고 배우세요"라며 쉽게 배우려 말고 스스로 터득해야 바로 배울 수 있다고 아비에게 충고했다.

네 엄마는 머쓱해진 내 꼴이 재미있는 양, "언제는 구박하더니, 보기 조옿습니다"라고 놀렸다.

네 누나가 대학에 진학하자, 그제야 너도 대학 진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책을 보는 시간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조금 길어지는 듯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 성적이 발표되자 제 공부한 것에 견주면 점수가 다소 후하게 나왔다. 대학 입시 원서 접수를 앞두고 너는 다시 고집을 피웠다. 학교에서 30년 동안 진학 지도에 이력이 난 아비의 말을 일축하고, 제 성적에 무리인 '전자공학과'만 고집했다. 아비가 네 점수로는 무리라고, 다른 학과로 생각해 보라고 충고해도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꼭 국문학과로 가야 하는데, 점수가 조금 부족하다고 일어과로 가시겠습니까? 저는 대학이름 보다 학과를 중시합니다. 올해 못 가면 내년에 가겠습니다."
"……."

듣고 보니 옳은 말이라, 내 소견은 꺾고 네 고집을 따랐다. 예로부터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나도 별수 없이 자식 고집에 손들어 버렸다. 너는 그해 2월 하순, 대학입시 합격자 등록 최종 마감 전날에야 합격 통지를 받고 등록해서 지금도 별 탈 없이 다니고 있다. 지금도 네 고집이 옳았다고, 네가 선택한 길로 후회 없이 살아가기를 구닥다리 아비는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도 기자가 최근에 출판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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