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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미1리 천하대장군들이다. 남한산성 동남편의 경기도 광주 일대에는 우리 나라에서 나무 장승들이 많기로 유명한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었으나 요즈음 들어 보존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 권기봉

요즈음 사내들이 소위 ‘물 좋은’ 나이트클럽에 가면 '삐까번쩍한' 외제차는 물론이요, 지갑에 현금, 하다못해 카드라도 두둑해야 대접받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울룩불룩 가슴’으로 대변되는 건장한 몸매와 매끈한 얼굴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그렇다면 나이트클럽에서 선호하는 여성상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 역시 ‘당신의 경제적 능력’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긴 하지만, 여자들은 특히 ‘쭉쭉 빵빵’ 몸매를 기본으로 ‘예쁘기만 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게 대세라고들 한다.

이는 비단 나이트 클럽만의 문제가 아니라 입사 면접이나 일상 생활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인생 원리’로, 남자든 여자든 바야흐로 ‘페이스’가 잘나고 봐야 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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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 못생길수록 대접받는 인물들이 있다. 비단 얼굴의 전체적인 모양새뿐만 아니라 피부는 웬만하면 얽어야 하고, 치아는 드문드문 나가고, 눈은 짝짝이요 입은 비뚤어져야 인정을 받는 것이다. 분장한 <개그콘서트> 출연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장승’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 장승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도회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최소한 대학 구내로 들어가야 한두 기 정도 볼 수 있는 실정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장승이 애초 갖고 있었던 기능이 퇴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재다능한 능력의 소유자, 장승

▲ 머리에 표현된 사모관대가 몸에 비해 커 보여 무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 나라 장승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대장군들은 대부분 사모관대를 쓴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엄미1리 천하대장군.
ⓒ 권기봉
지역이나 기능에 따라 ‘벅수’나 ‘법수’, ‘장생’이라고도 불리는 장승은, 본디 마을이나 사찰 등을 수호하기 위해, 혹은 길손들을 위한 이정표, 풍수지리상 허(虛)한 곳을 보(補)하기 위해 세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같은 기능 외에도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아들을 얻기 위한 염원으로서 장승을 세우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만든 사람 마음’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 것이 장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승이라고 분류되는 것들의 범위가 워낙 넓기에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장승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이미 전국에 산재해 있는 장승들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서양식 분류체계를 ‘선진’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인위적으로 갖다 붙인 체계인 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우리네 장승은 조선 후기까지만 하더라도 민중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 속에 존재해왔다. 보통 돌이나 나무로 장승을 만들게 되지만, 아무래도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깊게 패인 골 사이로 나잇살이 드러나는 나무 장승이 아닐까. 보통 장승은 지역에 구분 없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퍼져 있었지만 산업화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면서 마을 초입에 서서 정겹게 사람들을 맞던 장승들은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 동남쪽 경기도 광주 지방에는 장승들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일상 문화를 탐구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으는데, 엄미리와 번천리, 무갑리에 퍼져 있는 장승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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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이 첫날밤도 치르고 내외도 한다?

▲ 치켜 뜬 눈과 깊게 패인 입이 인상적인 엄미1리 천하대장군이라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모관대를 잃은 지 오래고 풍화되는 운명에 놓였다.
ⓒ 권기봉
서울에서 출발하자면 하남시를 지나 43번 국도를 타고 남하한 후 중부1터널 약 2km 전에 우회전, 엄미1리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길이 그리 넓지 않으니 초보운전자나 대형차 운전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43번 국도에서 약 6백m만 들어가면 엄미1리 장승들이 나타난다. 좁은 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내달리다 보면 안전 문제뿐만 아니라 숲 속의 장승을 놓치기 쉬우니 속도는 최소한으로 줄일 일이다.

엄미1리 장승들은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데, 그 사이를 지나는 여울이 둘 사이를 ‘무정하게도’ 갈라놓고 있다. 즉 개울물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들이, 반대편에는 수줍음과 근엄함을 동시에 보이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들이 서 있다.

사람도 아닌 것이 내외를 하는 것인지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어쩌면 그 옛날에는 진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장승들 역시 남녀 사이의 구분이 엄격했기에 그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둘의 시선을 보라.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진 않나?

비록 몸은 여울로 가로막혀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항시 시선은 서로를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말을 못해 그렇지 마음만은 항상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장승들이 이처럼 길을 양쪽에서 호위해줄 뿐만 아니라 개울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잡귀들을 물리치고 허(虛)한 지맥을 보(補)해주기에 기쁠지 모르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장승들에게는 이처럼 서러운 일도 없으리라.

그런데 장승이 자라면 어떡하죠?
- 장승이 ‘얼큰이’가 된 사연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진 않는가? 나무로 만든 장승이라면, 혹시 잎이 나고 뿌리가 돋아나 다시 자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얼치기가 만든 장승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만든 장승은 다시 자라지 않는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장승은 아랫부분보다 윗부분이 더 넓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장승을 깎을 때 아예 뿌리 부분이 위를 향하게끔, 즉 머리 부분을 새기게 된다. 이는 자칫 장승을 다 만들어 세운 뒤 뿌리가 나올 수도 있어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나무 밑동이 윗부분보다 굵기에 얼굴을 새기기가 더 수월한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장승들은 다 ‘얼큰이(얼굴이 큰 사람)’일까?
/ 권기봉
그러나 이들 남녀가 항상 이렇게 떨어져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무정한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뒀을까. 일반적으로 소나무나 밤나무로 만드는 장승은 풍화작용 때문에 수명이 채 10년이 안되어 2~3년마다 새로 깎게 되는데, 장승 역시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결혼도 하고 ‘첫날밤’도 치르게 된다.

즉 장승을 만들기에 알맞은 나무를 골라 정성 들여 깎아 글까지 새겨 넣으면, 대장군과 여장군의 입 속에 술을 붓고 성인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 후 은밀하지만 해학이 넘치는 합궁식이 치러지는데 남녀 장승을 나란히 눕히고 얼굴을 세 번 부딪히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야한 ‘그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부디 자신의 연애관을 돌아보길….

한편 장승을 마치 사람처럼 대해주던 옛 사람들의 인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장승이 제 몫을 다하고 사라질 때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즉 새 장승을 깎아 세울 때에도 옛 것을 바로 없애지 않는 관용을 보여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채 10년이 안 되는 수명을 채우고 너무 오래되어 심하게 썩어 제 구실을 못하게 되면 마을 뒷산에 무덤을 만들어 묻음으로써 제사의식을 치러준다. 어쩌면 나이 들어 괄시받는 현대 노인들보다 처지가 나은 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을 보호하던 장승, 보호받는 처지로 전락하다

▲ 간혹 삼끈으로 수염을 표현한 것들도 눈에 띤다. 새 장승을 깎아 세울 때에도 옛 것을 바로 없애지 않는 관용을 보여주는 등 대접이 비교적 좋았는데, 너무 오래되어 심하게 썩어 제 구실을 못하게 되면 마을 뒷산에 무덤을 만들어 묻음으로써 제사의식을 치러주기도 했다. 엄미1리 천하대장군.
ⓒ 권기봉
한편 여기서 6백m쯤 안으로 더 들어간 다음 작은 다리를 건너 왼쪽 길로 접어들면 엄미2리에 닿게 되고, 역시 장승들을 만나게 된다. 엄미2리 역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이번엔 오히려 엄미1리보다 둘 사이의 간격이 넓어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더욱 커 보인다.

여기서 잠깐. 아직껏 한번도 장승을 보지못한 도회지 사람이라면 ‘남녀 장승을 어떻게 구분하는가’하고 궁금해할 지도 모르겠다. 무슨 동물을 대하듯 꽁무니를 살필 필요는 없다.

그저 머리 부분만 보아도 구분이 가능한데, 남자를 나타내는 대장군은 큼지막한 사모관대를 쓰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삼끈을 가지고 늠름한 수염까지 달아 남성을 표현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당시 남자라면 모름지기 높든 낮든 벼슬을 해야 한다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단편이 아닐까. 반면 여장군은 크기도 대장군에 비해 약간 작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그냥 민머리를 하고 있어 대장군과 구분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엄미2리의 천하대장군은 여느 장승들과는 달리 철조망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장승은 마을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장승이 보호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고?

장승이 마을과 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를 받는 입장으로 변해 버렸으니, 장승 너댓 기가 함께 서도 이제는 놀라 도망갈 잡귀마저 사라진 것인가? 아니 그보다는 쉽게 보기 힘든 장승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텐데, 이제 사람들은 옛 ‘은혜’도 잊어버리는 처지가 된 듯 하다.

'꽃미남’ 장승이 소녀를 홀리다

▲ 장승의 적은 바람과 비와 눈, 모든 자연현상이다. 특히 나무 장승은 수명이 채 10년이 못되어 2~3년에 한번씩 새 장승을 깎아 함께 세워준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는 사진과 같이 버섯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엄미1리 천하대장군.
ⓒ 권기봉
엄미리 장승들을 뒤로하고 다음 마을을 찾아 나서자. 이번에 갈 곳은 보다 남쪽에 있는 하번천리다. 엄미리에서 다시 43번 국도로 다시 나와 3km 남짓 남쪽으로 달리면 왼쪽으로 184번 도로가 나타난다.

이 도로를 타고 역시 3km 정도 남쪽으로 달리면 중부고속도로 근처 하번천리에 이르게 된다. 이 장승들은 덤불 속에 있어 잎이 무성한 여름엔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수가 있으니, 웬만하면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날 찾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번천리 장승들은 여태껏 봐왔던 근엄이나 권위와는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해학이 절로 묻어나는 장승들이 경기도 광주 하번천리에 있다. 먼저 184번 도로 옆 덤불 속에 있는 것이 지하여장군과 지하대장군이다.

하번천리 천하대장군도 그렇지만 왕방울 눈에 웃음기 띤 입은 마치 요새 여자들 사이에 인기라는 ‘꽃미남’을 보는 듯 한데, ‘송승헌 눈썹’에 인상이라도 한번 써 보지만 잡귀가 이 앞에 서면 겁을 내 도망가기보다는 함께 앉아 장난이라도 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만큼 정겹고 귀엽게 생겨먹은 놈이 하번천리 장승이다.

특히 장승 아랫부분에는 전에 못 보던 것들이 적혀 있다. “이천 오십리, 서울 팔십리”. 이곳에서 경기도 이천과 서울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노표(路標)다. 앞서 장승의 기능 중에 길손들을 위한 이정표 구실을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하나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조선 태종 14년인 1414년 들어 관인들이 이용하는 도로의 10리(약 4km)마다 소후(小堠)를, 30리마다 대후(大堠)를 두는 안이 실행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제도는 1895년 역(驛)과 발참(撥站) 제도가 폐지되고 현대식 도로 표지 체계가 시행되면서 사라지긴 했지만, 당시 장승의 쓰임새가 생각보다 넓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하번천리 장승에 쓰여 있는 이천과 서울까지의 거리가 실제 거리와 일치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쯤은 될 것이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하다.

한편 이들 장승 맞은편에 내를 사이에 두고 천하대장군과 하번천리 양짓말 장승이 서있다. 천하대장군은 마치 천하를 호령할 듯한 이름을 가졌지만 그냥 수수한 모습이지 잡귀를 물리칠 성격은 아닌 듯하다. 다만 논두렁에 서있는 것을 보니 노동하다 지친 농부의 친구가 되어주었을 것 같긴 하다. 아니 어쩌면 아침도 거르고 학교에 간 아이를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 청동기 시대의 해방구였던 소도(蘇塗)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 ‘솟대’다. ‘짐대’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이상세계를 향한 날갯짓을 의미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진의 솟대는 이미 머리 부분을 잃어, 희망이 꺾인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엄미1리 천하대장군 옆의 솟대.
ⓒ 권기봉

억센 얼굴의 소유자, 무갑리 장승

그러나 원빈이 있으면 이대근도 있고, 꽃미남이 있으면 억센 장부(夫)도 있는 법.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 무갑리 장승을 찾아가 보자. 하번천리에서 오던 길로 계속 184번 도로를 따라 산허리를 하나 돌면 서하리 안골과 사마루에 닿는다. 무갑리는 여기서 조금 더 가야 하지만 답사를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 한번쯤을 장승 얼굴을 봐줄 일이다. 서하리 안골 장승은 마치 고양이처럼 얄미운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눌한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다.

사마루 장승을 지나 1km 정도만 더 가면 왼쪽으로 서하교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이내 무갑리 장승 앞에 서게 된다. 동네 이름이 예사롭지 않은데 병자호란 당시 투항하지 않은 장수들이 은둔한 곳이라서, 무사들이 입던 갑옷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산 이름이 무갑산이요, 마을 이름이 무갑리라고 한다. 그 영향을 받을 탓일까. 무갑리 장승들의 생김 하나하나가 저녁 어스름에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무섭게 생겼다. 게다가 얼굴에는 벽사(辟邪)를 의미하는 붉은 페인트칠까지 해 그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무갑리 장승 역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기능을 지녔는데, 바로 사방이 탁 트인 고장에서 허한 방위를 지켜주는 기능이다. 보통 다섯 방위를 지키는 오방신장(五方神將)이라고 해서 중앙의 황제장군(皇帝將軍)을 중심으로 동쪽의 청제장군(靑帝將軍)과 서쪽의 백제장군(白帝將軍), 남쪽의 적제장군(赤帝將軍), 북쪽의 흑제장군(黑帝將軍)을 꼽는데, 각각 중앙과 동서남북을 지키는 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무갑리에 있는 것은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과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이다. 아무래도 무갑산을 배경으로 무갑리 북쪽과 남쪽의 기(氣)가 약하다고 느꼈기에 이 두 방위를 지키는 장승들을 세웠나 보다.

앞으론 장승 보러 박물관 가야할 지도…

▲ 지하여장군은 천하대장군에 비해 크기도 약간 작고 사모관대도 쓰지 않아 다소 작아 보인다. 그러나 역시 뚜렷한 입 모양이나 치켜 뜬 눈은 보는 사람을 주눅 들이는 위엄이 서려있다. 엄미1리 지하여장군.
ⓒ 권기봉
그러나 이런 나무 장승들도 머지 않아 사진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현실이 닥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농촌 젊은이들이 도시로! 도시로! 떠나면 비단 논일 밭일할 일손만 줄어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무 장승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아 길어야 10년인데, 새로 만들고 싶어도 만들 인력이 충분치 않은 것이 요즈음 농촌 현실인 것이다. 실제로 2년에 한번씩 정월 보름에 장승제를 지내고 새로 장승을 만들어 왔다던 엄미리의 경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제주(祭主)를 할 성인 남자가 없어 근 몇 년간 장승을 새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엄미리의 경우는 마을의 흉복에 따라 빚어진 일이라지만 결국 주민의 수가 줄어듦으로서 생긴 일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앞으로 장승을 세울 때는 무조건 돌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장승들은 하나둘 스러져가고, 그네들의 정겨운 결혼식과 합궁식도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다. 마을을 지켜주던 든든한 위안도 사라졌다. 우악하게 생긴 무갑리 장승들도 스러져가는 판국에 ‘꽃미남’ 하번천리 장승들이 배겨날 리 없다. 이제 정말 장승을 보려면 박물관으로 가던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에 만족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살기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네 가슴 속은 자꾸만 공허해지는 2003년의 시린 1월이다.

▲ 사람에게 일생이 있듯 장승에게도 일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쓰러져 자연으로 되돌아갈 날만은 기다리는 이 장승은, 개울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잡귀를 물리치고 허(虛)한 지맥을 보(補)해주는 등 인간을 위한 삶을 살았다. 엄미1리 지하여장군.
ⓒ 권기봉

▲ 예전에는 장승이 인간들의 삶을 보호해 주었다지만 이제는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철망에 의해 보호받는 엄미2리 천하대장군은 이제 더 이상 그 옛날의 카리스마적인 장승이 아니다.
ⓒ 권기봉

▲ 엄미2리 천하대장군은 근처 엄미1리의 경우보다 상태가 불량한데 바로 길옆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결국 인간은 옛 은혜마저도 저버리는 것일까?
ⓒ 권기봉

▲ 예상외로 엄미2리 솟대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네 소망을 모아 하늘로 날아갈 듯 하다.
ⓒ 권기봉

▲ 엄미2리 지하여장군 세 기가 나란히 서있다. 보통 여장군과 대장군은 이처럼 여울을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있는데 인간도 아닌 것이 마치 내외를 하는 듯하다. 하기사 제작 당시 성인식도 치르고 합궁식도 거쳤는데 내외라고 못할까.
ⓒ 권기봉

▲ 인간은 그래도 연약한 존재여서 이제는 그 의미를 많은 부분 상실한 장승에게도 북어 한 마리 올리고 소원을 빈다. 특히 엄미2리 지하여장군 주변엔 돌을 쌓아 정성을 보였는데, 그 앞에 북어 한 마리가 누군가의 소망을 안고 놓여 있다.
ⓒ 권기봉

▲ 하번천리 지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솟대를 사이에 두고 정답게 서있다. 그러나 이 장승들만은 덤불 속에 있기에 잎이 무성한 여름보다는 낙엽이 진 겨울에 찾는 것이 나을 듯 하다.
ⓒ 권기봉

▲ ‘동그랑땡’ 눈이 상당히 인상적인 하번천리 장승들. 여태껏 봐왔던 장승들의 근엄이나 권위와는 거리가 멀고 해학이 절로 묻어나는 듯하다. 그런데 지하대장군은 뭐에 저리 성이 난 걸까?
ⓒ 권기봉

▲ 하번천리 장승 아랫부분에는 “이천 오십리, 서울 팔십리”라는 글이 적혀 있다. 길손을 위한 이정표 구실을 하는 것으로, 조선 태종 14년인 1414년 들어 관인들이 이용하는 도로에 일정 거리마다 노표(路標)를 설치하는 안이 실행된 적이 있다. 물론 지금 하번천리 장승에 쓰여 있는 것들은 상징적인 의미만은 갖는다고 볼 수 있다.
ⓒ 권기봉

▲ 솟대는 나무를 ‘Y'자 모양으로 깎아 몸통을 만든 뒤, 거기에 ’ㄱ‘자로 만든 머리 부분을 끼워 완성한다. 그런데 머리 부분이 종종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머리 없는 새가 되기도 한다. 하번천리 솟대는 몸이 굵어 듬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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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귀가 이 앞에 서면 겁을 내 도망가기보다는 함께 앉아 장난이라도 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겹고 귀엽게 생겨먹은 놈이 하번천리 장승이다. 아 장승들이 아가씨들을 홀릴 지도 모를 일이다.
ⓒ 권기봉

▲ 엄미리나 하번천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우락부락하게 생긴 무갑리 장승들. 생김새 하나하나가 저녁 어스름에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무섭게 생겼다.
ⓒ 권기봉

▲ 장승은 대개 '벽사'를 의미하기 위해 황토를 칠하는데, 무갑리 장승은 여기서 더 나아가 붉은 페인트칠까지 했다. 강렬함 그 자체다. 한편 여느 장승들과는 달리 치아를 일일이 표현했다.

▲ 혹시 아이섀도를 바른 것은 아닐까? 무갑리 장승이 얼굴 생김과는 달리 눈만은 크기도 크고 속눈썹까지 길어 예쁘기만 하다. 옛 사람들의 해학이란 것이 이런 걸까?
ⓒ 권기봉

장승 옆에서 날고 있는 ‘새’는 뭐죠?
- 이상세계를 동경하지만 이제는 그 자취도 사라져…

경기도 광주 일대에 분포한 장승들은 그다지 외롭지 않다. 주변에 어김없이 ‘새’들이 날고 있기 때문인데, 물론 정말로 하늘을 나는 새는 아니다. 이미 국사 시간 등을 통해 들어보았을 ‘솟대’다. 이는 청동기 시대의 해방구였던 소도(蘇塗)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로 그 연원을 비교적 짧게 보는 이들도 있다.

나무를 새 모양으로 깎아 세운 솟대는 ‘짐대’라고도 불린다. 광주 일대 솟대 중 어떤 것은 마치 물위에 앉은 오리처럼 생기기도 했는데, 지금은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인지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적지 않다. 마치 전령이라도 되는 양 높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듯 하지만, 솟대의 운명 역시 기구한 것이어서 장승과 함께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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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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