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완전히 잊혀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오래 꿈꾸었고 오래 준비해 몸 담았던 직장이었다. 사랑과 열정이 지나치게 끓어넘쳐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입혔던 일들, 그만큼 또 재미있고 행복했던 시간들. 그러나 그 직장에서 발길을 돌려 떠나면서 나는 잊혀지고 싶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그 마음 아직도 남아, 문득 마주치는 기억에 '정말 이제 그만 잊혀졌으면' 하고 진정으로 바랄 때가 있다.
마리안네는 헬데겐 회사 창업주의 며느리이며 사장 막스의 아내이다. 남편의 회사가 주관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수상작가인 베르톨트 묀켄을 만나 운명적이며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베르톨트를 만난 바로 그 날 밤, 어린 아들 귄터마저 그대로 둔 채 그를 따라 집을 나서는 마리안네. 이 도시 저 도시로 이어지는 사랑의 도피는 불안하고 외롭기만 하다.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는 마리안네에게 어느 날 시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한다.
이제 막 일흔을 넘긴 시아버지는 근면함 하나로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지만 아들 막스로 인해 금치산 선고를 받았다. 다른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간 며느리를 찾아와 마주 앉은 시아버지는 '나와 함께 가겠니?' 하고 묻는다.
베르톨트와의 생활을 6주 만에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마리안네. 애쓰고 또 애쓰지만 아무리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의 막막함으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이 같이 있었을 때, 불안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 베르톨트는 자신의 작품이 완성돼 무대에 올려지는 '11월'을 약속한다. '늦어도 11월에는' 모든 것이 나아지고 좋아지리라는 기대와 희망의 약속이었다.
11월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마리안네가 살고 있는 도시의 극장에서 베르톨트의 작품이 초연된다. 다시 한 번 베르톨트를 따라 나서는 마리안네. 두 사람이 함께 탄 자동차는 그들의 사랑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달리고, 결국 차는 철로 교각 쪽으로 날아간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생활이었지만 마리안네는 지루하다. 돈과 지위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껍데기뿐인 인간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안네는 갑갑하다. 지금 보이는 것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 유부남 아르님과의 첫사랑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
시아버지는 늘 일만 생각하고 사는 분이라 여기며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시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해 줄 것만 같은 존재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돈 많고 야심만만한 남편과의 생활을 견딜 수 없어 집을 나간 아내, 아내가 그 후 1년 반 만에 숨을 거둔 일도 시아버지는 일종의 '파산'이었다고 표현한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시아버지. 그래서 시아버지와 남편 앞에서 유유히 다른 남자를 따라간 며느리를 찾아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아버지는 아무리 자신이 백발이어도 스스로를 노인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아들을 자신보다 더 어른이며 더 현명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인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살아온 삶을 이야기한다. 오히려 그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그들의 약점을 이용했노라 고백한다.
안정되고 부유한 생활에서 벗어난 며느리의 용기에 놀라면서 시아버지는 어쩜 일찍 자기 곁을 떠나 목숨을 버린 아내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죽기보다는 차라리 새 생활을 찾아 떠났더라면, 마음 속 회한은 좀 덜했으려나.
아내의 죽음에 대해 자신의 사업과 명성에 끼칠 영향부터 생각하는 아들 막스를 바라보며 아버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상대가 죽어서 잊혀지고, 또 내가 죽음으로 잊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다행한 일. 이미 인생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아는 것이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시아버지는 알고 있다. 나이듦은 그래서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약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늦어도 11월에는 /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문학동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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