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노 당선자님께서 이공계 기피 현상의 핵심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대전으로 오셔서 KAIST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그리고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에서 과학기술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주위에서 써준 원고를 읽으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그래도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고 계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다른 여러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고, 그 때문에 노 당선자님께서 연구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것입니다.
특히 당선자님께서 "Science Korea, 과학기술중심사회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노무현의 약속"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속이 다 후련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22일의 국정토론회에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유세 중에 하신 말씀은 작금의 이공계기피사태(?)를 이해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선 노 당선자님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면, 이공계 기피현상이라 함은 이과를 선택하는 학생수가 근래 몇 년간 크게 줄어든 것을 말하는 것이며, 좁게는 이과 엘리트들이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의대, 치대, 한의대 등 의료계열 대학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어린 아이들로부터도 장래 꿈이 과학자라는 얘기를 들어보기 힘들게 되었고, 이는 장래의 꿈이 과학자라는 어린이가 4% 정도밖에 안 된다는 통계로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공계기피 현상의 원인이 무언지 선뜻 손에 닿지 않는다"는 노 당선자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 당선자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한번 뒤돌아보시라고요. 노 당선자님께서 가난에 찌들고 세상이 원망스럽던 그 어린 시절에 왜 기술고시도 행정고시도 아닌 사법고시를 선택하셨는지요?
노 당선자님, 만일 기술고시를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일 노무현이라는 어린 학생이 기술고시를 봐서 기술관료가 되었다면 지금의 영광이 가능할까요?
노 당선자님께서는 당시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려서부터 '돌콩', '천재' 소리를 들어온 야무지고 똑똑한 소년 노무현이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나 보기 위해 두리번거리다 찾아낸 것이 사법고시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사법고시 합격이 우리 사회에서 출세의 지름길로 통하고, 그 시험 한 번 통과하면 명예와 부와 권력 등 일생의 영화가 보장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노 당선자께서는 사법고시로 인생의 승부를 거셨던 것이고,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법시험에 목을 매고 세상을 등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공계 기피현상의 원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노 당선자님께서 살아오신 길을 뒤돌아보시면 지금 우수한 어린 학생들이 왜 이공계를 기피하는지 그 "손에 닿지 않는" 원인의 일부나마 뼈저리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인수위 구성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십시오. 처음 인수위 간사 7명이 발표될 때 내심 과학기술인들의 기대가 무너졌으나 그때는 조금 기다려보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그리고 16인의 인수위원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크게 실망했습니다.
25명의 인수위원 중 과학기술인이 1명밖에 안 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다른 분과 업무에도 분명 과학기술 관련 전공자의 참여가 필수일 것 같은데 모든 자리를 문과출신들이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1, 2차에 걸쳐 발표된 100명의 실무인력 명단을 보면서 실망은 거의 절망으로 변하였습니다. 100명 되는 인수위 실무인력 중 과학기술 인력은 아마 3명도 제대로 안 될 것입니다. 당선자님, 이건 해도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과학기술인력이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푸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는데 이공계 기피가 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이 "손에 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너무한 것 아닌가요? 더구나 지금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구축하겠다는 국정지표가 나온 상황입니다.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만들겠다는 노 당선자님의 의지를 그렇게 해서 실현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문과출신들이 만들어 줄테니 잠자코 있으라는 말인가요?
그리고 청와대 직제개편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과학기술 푸대접을 한번 보십시오. '1실 5수석 4보좌관제'의 어디에도 과학기술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통령 당선자는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시는데 조직짜는 칼자루를 쥐고 계신 분들은 과학기술이 도대체 뭐에 필요한지를 모르시는가 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진전을 바라보면서 과학기술인들의 마음은 처음의 기대에서 실망과 절망을 넘어 분노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말도 나오고 있고, 젊은 과학기술인들은 정치로 나서야겠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노 당선자님께 부탁드립니다. 지금의 이공계 기피사태로 빚어질 지도 모를 우리나라의 우울한 장래에 대해 주목해주십시오. 그리고 비등점을 향해 수직상승하고 있는 과학기술인들의 실의와 자조, 그리고 분노를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과학기술인들은 여태까지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적도, 거리로 나간 적도 없습니다. 그저 순진하고 묵묵히 국부를 창출하는 일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을 하게된 배경에 우리 과학기술인들의 땀과 노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그 공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열매는 엉뚱한 사람들이 가로채 갔고, 그들은 아직도 그들이 나라를 움직이는 주인인 양 행세합니다. 그리고 우리 과학기술인들은 오늘도 현대판 지식인 카스트제도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을 위해 땀흘려 일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인들이 자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헌한 만큼 몫을 돌려달라고 목소리를 높이자는 얘기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바보같이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비례하여 사회에 대한 불만도 높아갑니다. 그러기에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얘기도 힘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한두 분야에 나라의 인재가 몰리고, 사회의 명예와 권력과 부가 독점되고 있는 우리의 현 사회구조는 해소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공계 기피사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더욱 걱정되는 것은 그로 인해 우리나라가 치러야 할지도 모를 대가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 이웃 나라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그 교훈을 과학기술의 낙후에서 찾았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중국은 거의 과학기술 관료가 통치해 왔습니다.
지난 번 전국 대표자회의에서 뽑힌 상무위원 9명 전원이 과학기술 관료라는 사실을 아마 당선자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 넓은 중국에 법을 공부하고 행정을 공부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입을 얼마나 많이 받아왔고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왔습니까? 심지어는 식민지의 부끄럽고 처참한 역사까지 겪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나면 그만이었습니다.
글 읽는 선비가 최고였고, 기술자는 천시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런 후진적 사농공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걸까요? 이러다가 언제 다시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노 당선자님, 당선자님께서 대선기간 중에 과학기술인들에게 내건 공약의 방향은 참으로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청와대에 과학기술 수석 설치는 핵심사안입니다. 지켜주십시오.
과학기술인들의 지금의 '광야에서의 외침'을 그저 집단이기주의라 여기지 마시고 경청해주십시오. 우리 과학기술인들은 나름대로 나라의 발전에 대한 충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 당선자님께서 말씀하신 "과학기술 재입국"을 과학기술인들을 통해 이룩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자보>와 하니리포터에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