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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 인터뷰 기사 가운데 제1부에서 다 소화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제2부에 묶어 마무리했습니다....<편집자 주>

3. 독일 내외에서의 활동

▲ 송두율 교수
ⓒ 강구섭
- 독일에서 학업을 하게 된 구체적 학문적 동기가 있었는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원래 불란서에 관심이 있었는데 아버지 친구였던 불어를 전공하시던 아버지 친구분이 독일을 권유하셔서 뒤늦게 바꾸었다. 공부하고 싶었던 교수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있어서 거기로 갔었는데 그 교수가 이미 은퇴하고 없었다.

당시 하이델베르그 철학의 분위기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그래서 물리학이나 건축학으로 전공을 바꿀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하버마스 교수를 소개받았고 그래서 프랑크프르트로 옮겼다. 당시 하버마스 교수도 40대로 굉장히 젊었고 나는 아주 어렸고 그래서 집중적으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 독일 사회에 외국인이 교수로 재직한다는게 쉽지 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마 인문사회학자로서는 당시 내가 첫 한국인이었다는 거 같다. 당시에는 오래 있을 계획이 없었다. 학생 시절 대학 내부의 구조, 행정, 교과 등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해서 그런 경험을 쌓으면 한국에 가서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시작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3년 계약을 했었는데 그렇게 30여 년이 되어 버렸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사실 쉽지 않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굉장히 배타적이고, 동료들 보면 교수 의 아들이 많다. 그만큼 보수적이고, 외국인으로서 어렵다.

윈래 한국에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교수자격취득과정을 밟으려고 할 생각이 없었다. 그 때 아이들도 작았고 서울에 갈 생각으로 항상 가구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베를린에 오면서 77년 집에 처음으로 가구 없는 집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교수자격취득과정을 밟으라는 권유에 시작은 했지만 거기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반독재 운동 때문에 책상 앞에만 있을 수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강의도 기차 안에서 준비했다. 38세 때 교수자격취득과정을 마쳤고 그동안 독어 단행본 7권, 한국어 10권이 나왔다. 독일어 책을 현재 쓰고 있고 앞으로 좀더 신경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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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영화제에 상영된 <경계도시>

- 한국어 저서를 어떤 기회로 한국에 출판하시게 되었는지.
"한길사가 김언호 사장이 큰 역할을 했다. 김언호 사장이 88년 올림픽 무렵 한국 사회가 좀 자유화 되고 그러면서 프랑크프르트 도서전에 와서 나를 만서 내 책을 내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당시 한국 학계에서도 내가 누군가는 알았지만 두려워서 그냥 그렇게 있었는데 김언호 사장이 내 학위 논문 '계몽과 해방'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펴냈다. 그렇게 해서 한길사에서 4권의 책이 나왔고 사상서 시리즈를 계속 내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겨, 당대출판사에서 책을 내기 시작했다. 당대출판사에서 두 권 나왔고 그 이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네 권이 나왔다.

아직도 난 사실 아직도 한글 타이프가 서툴다. 그래서 대개 손으로 써 팩스를 보내면 거기서 타이프를 쳐서 나에게 인터넷으로 보낸다. 그러면 내가 다시 수정한다. 사실 어떨 때는 한국어 표현이 좀 어려울 때도 있다."

- 사이버 강의도 하시는 거 같은데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시기에 쉽지 않으실 거 같은데.
"여기에서 강의도 해야 하고 책도 내야하고 시간적으로 도저히 곤란해 사이버 강의는 안하고 있다. 한국에서만 매달 초 여러 원고 청탁이 들어온다. 미안하지만 다는 못하고 몇 개만 한다. 서울에서는 내가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 같다. 그래서 거절하면 서운해하기도 하고... 노력은 하지만 쉽지 않다. 여기에서의 활동을 위해 해야할 것이 적지 않고...

(내가 하는 것에 대해) 독일 동료들이 가끔 놀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나 스스로 와의 약속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하고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 비록 외국에 있지만 그만큼 더 많이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람으로서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삶의 경험 통해서 두고 온 우리 조국이 더 잘 되도록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그 이외의 활동에 대해 좀 소개해 주신다면.
"종종 이야기했지만 분단 이후의 각자 형성된 남북한의 학자들의 학문 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학자들은 머리로 접하는 사람들인데 물론 마음의 통일에 대해 말했지만 머리의 통일이 동반이 안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학자로서 두 세계가 갖고 있는 언어, 사고 체계에 대해 연구하고 정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행사가 언론으로 보도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행사를 사회적으로 알리고 효과를 사회에 파급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행사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해 논의했던 것들이 실제로 현실화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6.15 공동성명도 그런 오랜 작업의 산물이 아닐까 판단된다."

- 서울, 평양, 독일에서 돌아가면서 한 학기씩 강의할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영화를 만들 때 내가 서울에 못 가서 비탄에 빠진 사람으로 비춰져서는 안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강조했다. 경계인이라는 것은 어느 한 곳에 정착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계에 살기 때문에 한마디로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는 것. 그래서 서울과 평양에서도 강의하고... 지금의 살고 있는 독일도 나의 경계이고 나의 삶에 의미가 있다. 이런 나의 입장이 남북에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내가 서울에만 있으면서 평양에 가서 강의한다면 그것은 서울의 이야기다. 평양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외국에 있기 때문에 내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면이 있다.

내 입장은 남한이 북한을, 북한이 남한을 관찰하고, 그 관찰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즉 남과 북이 서로를 관찰하는 것을 관찰한다는 의미에서 나에게 관찰자로서의 영역에 있다고 본다. 남북이 서로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을 내가 볼 수도 있고 그것이 관찰자의 장점이 아닐까 여겨진다."

ⓒ 강구섭

4. 독일에서의 삶, 영화 <경계 도시>

- 뮌스터대학에 재직중이신데 뮌스터가 아닌 베를린에 거주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실 거 같은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후 72-77년까지 뮌스터대학 사회학과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시작했고, 77-84년 사이에는 베를린 자유대에서 계속 강의를 했다. 베를린에서 강의를 하는 사이에 뮌스터에서 교수자격취득과정(Habilitation)을 밟고 있었는데 그때 이미 아이들이 베를린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집사람이 베를린 예술대(UDK)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직장 때문에 집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이 학교를 옮기는 것도 그렇게 내키지 않고 해서 베를린에 있으면서 보통 2주에 한번씩 뮌스터로 내려가 목,금 이틀간 집중적으로 강의를 하며 며칠 머물다 올라온다. 학생들도 그렇게 집중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고 동료 중에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렇게 82년부터 베를린에서 살았다. 통일 전에는 뮌스터까지 6-7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3시간 30분 가량 걸린다. 그리고 94-97년 사이에 훔볼트대학에 한국어학과 초빙교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 한국에서 보다 더 긴 기간을 독일에서 보내셨는데 독일 생활은 어떠셨는지.
"한국에서 20년, 일본 2년, 여기서 만 35년 살았다. 아버지가 해방 후 경성제국대 후신인 경성대학에 교수로 근무하면서 서울로 왔다. 전쟁을 겪으면서 아버지가 전라도 광주로 내려가시면서 전남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거기에서 살았다.

독일 생활은... 학위를 좀 빨리 마쳤다. 28살에 박사학위를 마치자마자 뮌스터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서울에서도 들어오라는 권유가 있었다. 그때는 유신의 상황이었고, 민청학련 사건, 김지하 사형 선고 사건이 나면서 민주화가 급선무라는 생각에 고국의 운동을 지원하고, 국제사회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하고 그런 운동을 했다.

처음에 5년 정도 있다가 간다는 것이 대통령이 저격 당하고 그 후에도 광주의 비극이 일어나고 그렇게 10여년이 넘게 지났다. 그 후 통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91년 평양 방문 이후 95년부터 북경에서 남북 해외 학자 회의를 정기적으로 주도하고 그러면서 학자간의 교류를 계속 추진했다."

- 독일에서의 활동이 아닌 삶에 대해 여쭤보았는데 말씀을 안하시는 거 같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직도 미래진행형이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니고... 어느 나라에서든지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정치적 망명 상태에서 산다는 것이 심적으로 재미있고 유쾌하고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처지에서 재미있게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항상 두고 온 분단된 땅, 거기에서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삶,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편안한 삶은 아니었다.

다행이 가정적으로 모두들 건강하게 지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이 기뻐도 기뻐할 여유가 없고 슬퍼도 슬퍼할 여유가 없는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96년 귀국을 하려고 했는데 안되었고, 그렇게 살고 있다."

▲ 부인 정정희 여사와 함께
ⓒ 강구섭

- 부인께서 교수님과 결혼을 결정하실 때 아주 어려운 결단을 내리셔야 했을거 같은데.
"결혼을 결정할 당시는 유신이 본격화 되기 직전이라 그렇게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결혼 직후에 상황이 그렇게 바뀌었다. 집사람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나 1년 정도 연애생활을 하다가 결혼했다. 집에서는 서울에 와서 식을 올리라고 했는데 그냥 여기서 했다. 독일말로 나보다 나은 반쪽이라고 내가 어려울 때 동지로서 항상 침착하게 힘이 되었고, 나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고 고생도 많이 했다.

유신시절 해외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었고, 밤에 다닐 때 혹시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신경도 많이 쓰고 살아야 했다. 물론 서울보다는 안전했지만 서울이 아니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집사람은 독문학과 도서관학을 공부했고 현재 베를린 예술대 영상연구소에서 사서로 근무하고 있다. 집사람도 아직 한국에 한번도 못 다녀왔다."

- 두 아들이 있다고 들었다. 자녀들은 자라면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아이들은 모두 여기에서 태어났고 한국에 가본 경험이 아직 없고 느낌도 없을 것이다. 한국에 보낼 수도 있었지만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가 불안해서 그냥 말리셨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해서...

한 두 학기 한국에 가서 말이라도 배우고 한국 사회를 알고, 문화를 알고 그랬으면 하는데 아직 실현이 안됐다. 한국어를 이해는 하는데 말은 잘 못한다. 그렇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고 한국에서 활동할 날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렸을 적에 늘 '김대중 석방'이라는 글자를 보고 듣고 자라서 어렸을 때부터 김대중 이름을 알고 컸다. 지금도 사회문제에 대해 비판적이다. 큰 아들은 화학 박사과정에 있고 둘째는 미국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어서 기쁘다."

- 한국에 계시는 가족들은 어떠셨나.
"부친이 나름대로 명사였기 때문에 그래도 좀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유신 때 가족들이 인질이 되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당시 한국에 외국에 나갈 수 있는 복수 여권 소지자가 천 명도 안되었다고 들었는데 부친이 그것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친도 공항에서 여권을 빼앗겼다.

이래 저래 그런 약점을 이용해서 괴롭히는 일도 많았던 거 같고, 부친이 회사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도 문을 닫았다.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나와 관계를 좀 만들어 보려고 취임식에 나를 초청하고 그러면서 조금 괜찮아 졌다. (물론 가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결혼 직후에 독일에 다녀가셨고 84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나오셨었다."

-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우리집의 분위기가 아버지가 물리학을 하셔서 토론을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한때 물리학을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기계를 발명해 경제적으로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고 그래서 60년대에 유학도 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없는 자, 당하는 자에 대한 동정, 함께 하는 것, 그들에 대한 책임, 그런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것이 우리 가정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 친우 김지하 시인이 보낸 난화 그림
ⓒ 강구섭
당시는 정말 전쟁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다. 학교에 칫솔부대라고 해서 칫솔 하나 가지고 학교 왔다 갔다 하다 학교 졸업하고 4년 내내 교복하나로 생활하던 친구도 많았다. 다 어렵던 그 시절, 감수성 예민할 때 친구들, 특히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김지하, 김정남 같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민족문제, 사회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았다.

그래서 유학 와 있으면서도 내 논문 주제가 서양사람들이 제 3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와서 베트남전의 실상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야만적인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여한 나라로서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서양의 철학자들이 타자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계몽과 해방'이라는 논문으로 나왔다."

- '경계도시' 영화에서 주연(?)을 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신지.
"(웃으며) 철학 하는 사람이 영화한다는 것이 사실 힘들다. 지도교수였던 하버마스도 TV에 잘 출연하지 않았다. 철학적 표현을 전달하는 것이나 사상을 전달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학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내 삶이 굴절되었고 그 속에서도 내가 나의 길을 가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에 영화에 출연했다. 철학적 주제였더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여러가지로 잘 만들어진 거 같다. 사실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해외에서 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표성 때문에 내가 나오게 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70, 80세가 된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아직도 전근대적인 한국사회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기 위해 나오게 되었다.

난 일본에서 태어나 거기서 2년, 한국에서 20년, 독일에서 만 35년 가량 살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영화에서 김지하씨 등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상당히 먼 과거의 일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학위를 받고, 직장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곧 환갑을 맞이하는 여기서의 30여년이 나에게 더 의미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볼 때 어떤 것에 관심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삶 자체에 대한 것인지, 비록 한국에서 20여 년 정도밖에 안살았지만 나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것인지... 아무래도 분단과 관련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영화가 분단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삶은 반영이 안된 측면이 있다.

▲ 영화 경계도시 촬영현장이기도 했던 송 교수의 서재
ⓒ 강구섭
- 영화에서 한국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한국 방문 계획은.
"방문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침판이 남북을 찾을 때 떨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떨림의 긴장이 나에게 있는 것이 좋은 것이지 고정되어 있는 그런 것은 아닌 거 같다. 그 속에서 내가 또 나의 영역을 찾을 수 있을 거 같고. 여기의 삶도 나에게 있고 남한도 있지만 북한도 있다. 내 안에 그러한 긴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을 한번 다녀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내가 그렇게 비춰지는 영화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갖고 있는 고향의 의미는 윤이상 선생님하고는 다르다. 그분은 통영에서 자라 거기서 음악의 세계가 트여 항상 통영 이야기를 하셨는데 난 그런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

일본에서 자라 어릴 때 전쟁의 와중에서 강릉, 서울, 전라도로 내려가 중학교를 마쳤다. 그 이후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에서 살았고 그러다 여기에 왔고... 그런 공간의 의미에서의 고향은 나에게 없다. 오히려 미래의 같이 잘 살고 남북이 화합하는 그런 아름다운 미래지향적인 세상이 오히려 나에게 더 강하다.

당장 계획은 없지만 노무현 정권에서 언제쯤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를 모함하던 세력들도 이제 어느 정도 힘을 잃었다고 판단되고 이회창 정권이 오기를 기다렸던 사람이 있었는데 안되었고 또 5년을 기다리기도 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또 다른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30여 년을 기다렸는데 1-2년을 기다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 영화 '경계도시' 초반부에서 한국에 있는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오마이뉴스> 독자를 비롯한 한국에 있는 젊은이, 모든 사람들에게 한 말씀.
"요즘 독일에서는 머리 아픈 생각하지 않고 그저 즐기는 사회에 대해 젊은이들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민족의 문제, 계층, 지역의 갈등 등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즐기는 것도 좋다. 항상 찌푸리고 고민하는 게 삶 자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도 고유한 특수한 문제가 있다는 것, 탈이데올로기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이데올로기 문제, 분단의 문제가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 외에도 많은 사회적 문제, 여성, 환경, 교육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엮어 내고 해결해 가는 긴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누군가가 외국에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우리 땅에서 우리의 역사와 시간, 토양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세계화라는 전 세계의 보편적인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 우리는 동시에 비동시적인 분단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을 결합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교조적으로 어떤 한가지를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면서 원칙을 지키는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터뷰 후기

▲ 부인이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송 교수
독일 통일, 남북 문제와 관련, 각종 출판물 매체를 통해 한국사회에 자신의 철학을 이미 충분히 소개한 송 교수를 만나면서 사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으나 송 교수에게는 아무래도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남북문제, 통일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익숙해 보였다. 재차 질문을 하면 그제야 송 교수는 짧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것도 미래형으로 몇 마디 내놓았다.

필자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은 재직중인 학교에서 500km 이상 떨어져 있는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통일문제를 고민하는 송 교수가 그에 대한 더 깊이 있는 경험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활하는 게 아닐까 필자의 판단이었으나 그리 특별(?)하지 않은 부인의 직장, 아이들의 학교 때문이라고 대답해 잠시 당황하기도 했다.

기사를 쓰기 위한 인터뷰를 처음하는 필자가 스스로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껴 혹시 더 말씀하실 거 없냐고 마지막으로 묻자 선생님은 잠깐 뜸을 들이시다가 한국 학생들이 별로 책을 읽지 않는 것 같다는 걱정을 하셨다. 한국에서 출판한 저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송 교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그는 인터넷도 좋고 영상도 좋지만 그래도 사람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데 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며 책읽기의 중요함에 대해 강조했다.

그리고 끝으로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젊은이들에게 좀 따분할 수도 있는 오래된 역사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분단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나타냈다.

인터뷰 후의 피자와 샐러드를 앞에 놓고 이루어진 식탁 대화에서 송 교수와 정 여사는 이제는 너무나 바뀌어 있을 한국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보기 위해 필자에게 간간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우리가 떠나 있는 한반도 땅을 대화의 주메뉴로 오랜 시간 그리 가볍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중에 송 교수는 한국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펼치고 있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기 까지한 '편안하게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하는 식의' 일부의 분위기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는 곧 경계인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아직 이해 받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거 같다.

원래 기자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이른 시일 내에 한국 방문이 성사되고 한국 가시는 것 공항에서 배웅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으나 필자는 그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경계인으로서의 위치에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송 교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분명해야지 그렇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경계인의 자리는 어쩌면 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신 가운데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송두율 교수, 정정희 여사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강구섭 기자

덧붙이는 글 | 강구섭 기자는 북한이탈 주민의 남한사회 적응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고 현재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 재학중이며 동서독 통합의 관점에서 통일 이후 실시된 성인교육이라는 주제로 박사과정(교육학)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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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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