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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일터는 서울에 두고 인천에서 사는 한 시인(詩人) 친구가 있습니다. 옛날 고등학생 시절과 청년 시절 한때 친동기처럼 가깝게 지낸 친구랍니다. 내가 고교 2학년이던 어느 날 1학년인 그 친구가 운동장의 내게로 와서 무슨 편지인가를 주고 간 날부터 우리의 각별한 인연은 시작되었지요. 그림에 소질이 있는 그 친구는 우리 집에도 자주 오고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도 내 신앙 권유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각자 군대를 갔다오고 서로 삶의 처지가 다르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오래 적조의 세월을 살게 되었는데, 10년하고도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다시 연락이 되어 인천에서 만났을 때 보니 그 친구는 놀랍게도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성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로부터 엊그제 저녁 전화가 있었습니다. 한 여성의 이름을 대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일 안면도 창기리 고향 땅에서 장례를 지내니 시간을 내어 한번 찾아보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자기도 내려와야 하는데 전날 의정부 상가에 갔다 오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목을 좀 다쳐 병원에 있다며, 내게 꼭 연락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입에서 부친상을 당한 그 여성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감미로운 느낌을 삼켰습니다. 내게 무척이나 정다운 감회를 안겨 주는 이름이었습니다. 내 고등학생 시절 풍성한 추억의 한켠에서 감미롭고 명료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이름….

당시 신설학교였던 내 모교는 남녀공학으로서 내가 3학년이던 해 처음으로 1학년 교실의 책상 한 줄을 여학생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남쪽 창가 책상 한 줄을 차지하고 앉은 1학년 여학생 아홉 명은 하나같이 예뻤습니다. 여학생이 없는 2학년과 3학년 학생들은 은근히 1학년 후배들을 부러워하곤 했지요.

고등학생 시절 나는 중·고등 병설인 학교 안에서 꽤 유명한 축이었습니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지요. 수많은 학생들이 골키퍼인 나의 연습 모습을 보며, 고양이같이 공중으로 몸을 날리곤 하는 내 동작에 감탄을 하곤 했지요.

운동만 잘하는 게 아니고 글도 잘 지어서 중앙일보에 시조가 뽑혀 실리기도 하니, 거기다가 학생 간부로 완장을 차고 설치기도 하니, 수많은 후배 학생들에게 나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64년 여름 우리 태안천주교회는 드디어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신부님이 부임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해 가을 처음으로 중·고등부 학생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영세를 받은 신자 학생은 나와 중학생이던 내 누이동생 단 둘뿐이었는데, 처음 학생회를 만들 때는 참가자가 10여 명에 불과했지만, 내가 3학년이 된 해에는 무려 70명까지 학생회원들이 늘어났지요.

나는 고등학교 2학년과 1학년 교실은 물론이고 중학교 교실들도 다니며 천주교에 나오라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열심히 천주교 얘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 결과 성당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학생회에 가입한 학생들의 수가 한때는 70명까지 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놀라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때 처음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서 그 후 영세를 받은 사람들이 꽤 되는데, 그들 중에는 지금도 계속 우리 태안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도 여러 명이나 됩니다.

나는 고3 시절에 학교 안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일을 하면서 1학년 교실에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고1 교실을 가장 자주 들락거렸지 싶습니다. 하여간 1학년 아홉 명의 여학생 중에서 3명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엊그제 인천에서 사는 시인 친구의 입에서 오랜만에 다시 이름을 듣게 된, 최근에 부친상을 당한 그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인도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3명의 1학년 여학생들 중에는 교장 선생님의 따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를 절었습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그녀를 나는 가엾어하는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런 감정은 곧 연모의 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 연모의 정과 관련하는 이야기들은 내 여러 편의 소설들 속에서 채색이 되었고….)

그런데 그녀와 이번에 부친상을 당한 사람은 고교 시절 항시 붙어 다닐 정도로 단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장 선생님의 따님 여학생에 대한 연모의 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는 그 단짝 친구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 단짝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학년이 다르면서도 나와 이미 가장 절친한 사이가 되어 버린 그림을 잘 그리는 2학년 친구의 집에서 그녀가 자취를 하기 까닭이었지요. 어쩌면 그녀 때문에 나는 학교 근처에 있었던 그 친구 집에 좀더 자주 갔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안면도 출신인 그녀는 혼자 자취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학생인 여동생도 태안으로 전학을 와서 함께 생활했는데, 내가 고교를 졸업한 해부터는 남동생도 와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두 동생에게도 전교를 하게 되었지요.

한가지 아쉬운 것은, 안면도 출신인 그녀는 성당에 잘 다니고 학생회에도 열심히 참여했지만 끝내 영세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세례 받는 것은 끝내 원치 않아서 내가 몹시 섭섭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 대신 내가 연모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 단짝 친구, 교장 선생님의 따님 여학생은 그 핸가 다음핸가 언니 동생과 함께, 3자매가 함께 영세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에 의해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교장 선생님의 따님들, 그 3자매 소식을 지금은 전혀 모릅니다. 청소년 시절 나로 하여금 연모의 정을 갖게 했던 그 사람이 후에 미국 사람과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풍문을 어느 해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 같은데,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내가 교장 선생님의 따님, 그 불구 소녀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자못 괴로워할 때 의논 상대가 되어주곤 했던 단짝 친구, 안면도 출신인 그녀는 그 후 35·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작가 명색을 걸치고 살기 시작했을 때 고향에 온 그녀가 나를 만나 축하를 해주었던 일을 나는 지금도 즐겁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내 고교 1년 후배인 성악가 심송학 경북대 예술대 교수가 고향에서 처음으로 독창회를 열었을 때 심 교수의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이 많이 모인 태안문예회관 자리에서 그녀와도 잠시 만났지요.

그리고 이번에, 부친상을 당하여 부친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을 찾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부친상 소식을 전해 준 인천 친구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녀의 두 동생도 35·6년 만에 다시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냉큼 들어서 크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17일) 오전에 안면도로 차를 몰고 가면서 35·6년의 세월을 건너 띈 지금 그녀의 두 동생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마음속에서도 내 청소년 시절의 감미로운 추억들을 살풋이 떠올리곤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이름 박문희 뿐만 아니라 여동생의 이름 순희와 남동생의 이름 춘서를 잊지 않고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내 기억력이 놀랍고 다행스럽기도 했습니다.

장지(葬地)는 안면도 창기리 초입머리와 새끼섬인 황도 사이 '검은돌'이라는 마을의 야산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한 나머지 차에 있는 레지오 수첩도 품에 넣지 않고 장지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고인의 본당에서 온 듯한 사람들, 레지오 수첩이나 상장예식서를 손에 들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순간 야릇한 감동 같은 것이 내 가슴에 가득 차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문희씨가 맨 먼저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했습니다. 내가 오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대뜸 언제 영세를 했느냐고 묻고 세례명을 물었습니다. 그녀는 20년 전에 영세를 받았고, 세례명은 헬레나라고 하더군요. 안경을 쓴 그녀는 50대 중년의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동생 순희씨도 나를 이내 알아보았습니다. 그녀도 안경을 쓰고 몸이 조금 불어난 모습이 40대 후반의 세월을 잘 나타내고 있었지만 귀엽고 순박한 표정은 소녀 시절과 별 다름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인 남편과 만나서 소녀 시절 경험도 있는 덕에 쉽게 신자가 되고 성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며 해맑게 웃었습니다. 영세명은 데레사라고 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중학교 교실까지 돌아다니며 참으로 극성맞게 전교 활동을 했노라는 말을 하면서 다시 웃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극성스러우냐고 하면서….

외아들 처지로 장례를 주관하는 막내 춘서씨는 소년 시절의 귀엽기만 하던 앳된 모습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40대 중후반의 믿음직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일찍 했는지 아들이 벌써 군에 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도 이미 예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데, 영세명은 에우제비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탄성을 머금었습니다.

내가 처음 그들을 성당으로 이끌었을 때는 그냥 다니기만 하고 진짜 신자는 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들이 어느새 모두….

그들 아버지의 유해를 땅에 묻고, 의정부 용현본당에서 온 신자들과 함께 하관예절을 하면서 나는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 한켠에 나와의 청소년 시절의 인연 한 자락이 살풋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한없이 즐겁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장지에서 점심을 먹고 그들 삼남매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져 집에 돌아온 나는, 어제는 좀더 일찍 백화산을 올랐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계속 묵주기도를 하면서도 나는 바로 어제인 듯하면서도 아스라이 멀어진 35·6년 전 청소년 시절을 추억하곤 했습니다. 나에게도 그리운 일들이 많다는 사실이,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날들이 참으로 많았다는 사실이 왠지 다행스럽고 감미롭게만 느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비 온 뒤의 상쾌한 기운을 심호흡하며 백화산 정상에 좀더 머물렀습니다. 가로림만 쪽의 풍광에 다시 취하다가 문득 눈 아래를 보니 예쁘게 생긴 작은 산새들이 간드러진 소리를 내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봄을 만나 짝짓기 행사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들의 움직임을 쫓다보니 문득 저 새들에게도 그리움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새들에게도 오늘의 저런 일을 훗날 그리워하게 되는 시간이 있을까….

새들에게도 그리움이 있을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그리움이 있으리라는 쪽으로 나는 생각을 하고 싶었습니다. 설령 그들에게는 그리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들을 그리움의 눈으로 보거나 사람의 그리움 속에 그들이 존재하기도 한다면, 역시 그들에게도 그리움은 있을 터였습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한 마리 그리움의 새가 되어 있으므로….

그리운 것을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사람에게 주신 하느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게 많은 그리움을 주시고 많은 것들을 그리워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니, 생각하면 그것 역시 고맙고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그리움도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일 터였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움을 잘 채색하고 갈무리하는 일은 사람, 본인의 몫일 터였습니다.

그리움이 점점 더 커지고 많아지는 인생의 둔덕에서, 그 그리움들을 하느님의 선물로 잘 간종그리는 일도 꼭 필요한 일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헤어지기 싫은 산의 정상을 조용히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가톨릭 굿 뉴스> 게시판에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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