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정연이 곁을 떠난 것은 지난 99년.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때 동생 혁춘이는 2살이었다. 아빠는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 가정환경 조사서 아빠 직업란에 판사나 검사를 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좋아했다. 그런 아빠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연일 나왔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이고, 반국가단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아빠에게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어머어마한 딱지를 붙였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건 아빠는 정연이에게 늘 따스한 분이었고, 푸근하고 넓은 품이었다. 그런 품이 여름 햇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햇살이 사라짐과 동시에 엄마도 빼앗겼다.
생계를 책임진 엄마는 학원 강사 생활로 밤늦게 들어왔다. 엄마는 퇴근하며 아이들 자는 모습을 보았고, 정연이는 등교하며 엄마 자는 모습을 보았다. 일요일이면 아빠 면회를 가야했기에 엄마는 바빴다. 아빠가 계신 대전까지 갔다오면 또 밤이었고, 엄마는 정연이와 혁춘이 잠든 모습을 보며 잠들었다.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혁춘이가 울면 정연이가 달랬고, 혁춘이에게 말을 가르친 것도 정연이었다. 소꿉놀이를 하면 엄마 노릇을 한 것도 정연이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목요집회나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에서 아빠의 석방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 읽은 것도 정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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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4년간 정연이는 어린이 세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른이 되었다. 정연이가 홀로 어른되기 연습을 하는 사이에 남쪽의 대통령은 북쪽의 국방위원장을 만나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으며, 그 사이 남과 북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손에 손을 잡고 동시 입장을 했고, 그 사이 북의 응원단은 부산 아시안 게임에 와서 북녘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했다. 그 사이 너무도 많은 남쪽 사람들이 북의 금강산을 다녀왔고, 남녘 이산가족들은 북의 가족을 만나 부둥켜안고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연이가 아빠 품에 안겨 실컷 울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단지 무미건조한 '양심수의 딸'이라는 꼬리표만 따라붙을 뿐이었다.
재작년 기어이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 생계를 책임지랴, 면회 다니랴, 아빠 석방 운동하랴, 피곤이 누적된 엄마는 자유로에서 졸음 운전을 하다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사람들은 살아난 것이 용하다했다. 그 엄청난 사고 앞에서 정연이가 남긴 말은 한마디였다.
"그래, 엄마는 좀 쉬어야 해. 이참에 푹 쉬어."
엄마의 몸이 회복되고 얼굴이 제 모습을 찾기까지 몇 달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그 기간에 정연이는 늘 엄마 곁에 있었다. 아빠가 곁에 없는데 엄마까지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올 2월. 정연이는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학생 대표로 상을 받았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게 주는 상 대표로 정연이가 단상에서 상을 받았다. 아빠가 없는 졸업식장에서 정연이는 당당하게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이렇게 컸어요. 정연이가 이렇게 컸어요. 훌륭하지요? 아빠 딸답지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심수 석방 요구가 높아졌지만, 취임식과 동시에 연례 행사처럼 해오던 양심수 석방 소식은 없었다. 아빠 담당 변호사였던 강금실 아줌마가 법무부 장관이 되었는데도, 전두환도 하고 노태우도 하고 김영삼도 했던 양심수 석방이 없었다.
엄마는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면서 서울구치소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하였다. 엄마가 천막 농성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밤이면 엄마와 함께 잘 수 있었지만, 천막농성 시작 후부터는 토요일, 일요일에만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3월의 바람은 차가웠다. 주변 분들은 천막 농성장에서 자면 감기 걸리니까 집에 가서 자라고 했지만, 엄마랑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는 혁춘이의 바람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엄마랑 혁춘이랑 정연이랑 밤새 장난치며 이야기하며 천막 안에서 잤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전국의 교도소를 걸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빠 석방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며 전국 20군데 교도소를 걸어간다고 했다. 몸이 약한 엄마가 걱정되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아빠가 나올 수만 있다면 정연이도 토요일, 일요일에는 엄마랑 함께 걷겠다고 했다.
3월 22일 토요일 오후. 3주간의 천막 농성을 마치고 '양심수 석방과 수배 해제를 위한 전국 교도소 순례' 출발식이 있는 날 정연이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있는 서울구치소 앞으로 갔다. 엄마랑 헤어지면 또 1주일을 기다려야 했기에 혁춘이랑 부지런히 갔다. 집회가 거의 끝나가고 단장을 맡은 최진수 아저씨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연설 중에 엄마가 암이라고 했다. 엄마가 암이라 교도소 순례를 못하고 남아 있는다고 했다. 교도소 순례 하루 전날 암선고를 받았다고 했다. 의사가 왜 이제야 왔냐며 호통을 쳤단다. 엄마가 암이란다. 아빠도 없는데 엄마가 암이란다. 고생만 한 엄마가 암이란다. 엄마가 암이란다.
그날 정연이는 울었다. 많이 울었다. 엄마가 심하게 교통사고 났을 때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던 정연이가 울었다. 아빠가 4년간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울지 않던 정연이가 엄마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혁춘이를 돌보다 너무 힘들어 코피를 쏟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혁춘이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봄이다. 벚꽃이 조금만 기다리면 필 것이다. 4월 중에 양심수 석방이 있을 거라고 세상은 말한다. 정연이는 꿈꾼다. 벚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를 아빠랑 혁춘이랑 엄마랑 함께 걷는 꿈을. 혁춘이는 아빠 무등을 탈 것이다. 노란 풍선을 좋아하는 혁춘이 손에는 풍선이 쥐여 있을 것이다.
어쩌면 수술한 엄마는 휠체어를 탈지도 모른다. 휠체어는 아빠가 밀 것이다. 항암 치료 때문에 엄마는 예쁜 머리를 삭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괜찮다. 정연이는 그런 엄마를 위해 엄마 머리보다 더 예쁜 모자를 준비할 것이다. 아빠는 엄마 휠체어를 밀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혁춘이는 노란 풍선을 들고 엄마 주변을 맴돌 것이다. 바람이라도 한번 불라치면 벚꽃이 흩날려 눈이 온다며 혁춘이는 좋아라 할 것이다.
벚꽃이 필 때면 자주 볼 수 있는 가족들 흉내를 올 봄 정연이는 할 수 있을까. 정연이에게 엄마, 아빠가 아픔이 아닌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정연이 어깨를 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게 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정연이는 이모에게 물었다.
"아빠가 나오면 우리는 어디서 살지?"
"왜?"
"엄마가 걱정돼서. 그냥 외할머니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그럼, 아빠가 불편하지 않을까?"
"그래도 아빠는 많이 쉬었잖아. 할머니랑 같이 살면 엄마가 불편해서 안돼. 엄마는 쉬어야 하잖아. 아빠가 엄마 퇴원하기 전에 나오겠지?"
(편지1) 하정연이 아빠에게 보낸 글.
보고싶은 아빠에게.
아빠는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아빠가 내 곁에 있지 않았던 지난 3년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아직 반도 못 채웠어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 아빠는 아주 좋은 사람인데… 아빠랑 하룻밤만이라도 잠을 자보고 싶어요.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혁춘이랑 우리 가족 모두 손잡고 동네 놀이터라도 가봤으면 좋겠어요. 밤에 눈 한번 깜빡 감았다 뜨면 아침인 것처럼, 남은 5년을 그렇게 눈 한번 깜빡해서 보내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아빠. 아빠와 멀리 떨어져 살지만 우리는 누구도 떼어놓지 못하는 한 가족인 거 아시죠? 아빠가 빨리 나와서 컴퓨터도 배우고 운동도 같이 하고 싶어요. 아빠가 좋아하는 낚시도 함께 해보고 아빠가 혁춘이에게 약속한 `하늘 날기'도 보고 싶어요. 꼬마였던 내가 이제는 예비숙녀가 되어 가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자유로운 곳에서 마음껏 아빠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와 우리 집에서 지낼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아빠! 그곳이 춥진 않나요? 추울 때는 옷도 몇 겹씩 껴입고 이불도 2~3겹씩 덮고 주무세요. 안녕히 계세요. 사랑해요!
아빠의 딸, 정연 올림.(2002. 12)
(편지 2) 김소중씨가 남편 하영옥씨에게 보낸 글.
나의 당신! 보셔요!
어느 덧 세월은 흐르고 흘러 3년하고도 반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당신 없이 보내야 할 8년이 아직 반도 더 남아 있지만… 어쨌든 살아 있으니 느릿느릿 더디게 8년을 채워 나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막막하고 서럽고 힘겨웠던 시간들이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살아 있음이 어찌나 무겁고 아파 오던지 남모를 눈물을 많이도 흘렸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가엾고 지친 모습들로만 가득 차 있는 듯 하였습니다. 당신과 아이들을 놔두고 홀로 죽음의 문전까지 다녀오기도 하였지요. 그랬어요. 늘어질 대로 늘어지고 지칠 대로 지쳐 버려 그 어떤 충격도 흡수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오히려 커다란 사고에도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하더군요. 아빠도 없이 엄마가 당한 교통사고로 어린 아이들이 받았을 그리고 당신이 겪었을 고통은 아마 말로 표현하기 어렵겠지요. 다섯 살짜리 혁춘이가 "우리 엄마가 죽을 뻔했다. 기도해 달라"고 하여 혁춘이가 다니던 선교원의 목사님께서 그 눈망울에 발길을 잡아 문병을 오셨습니다.
그 때 불현듯 당신의 말이 생각이 났어요. "가장 바닥에선 위만 보인다"고 했었지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죽을 수도 있었던 커다란 사고를 겪고 나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겁 많고 눈물 많고 사소한 작은 일까지도 당신 없이는 할 수 없었던 나에게도 조금씩 힘이 생겼습니다. 당신의 팔을 빌리지 않고는 곤한 잠을 청할 수 없었던 내가 오히려 곁에 사람을 두고는 깊은 잠을 잘 수 없게 되었지요.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려는 노력의 영향이겠지요.
그래서 일까요?
정연이와 혁춘이는 아빠와 엄마 없이 식사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더는 어색해 하지 않습니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응석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해달라 사달라 조르거나 억지를 부리거나 고집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휴일에도 왜 나가느냐 언제 오느냐고 묻지 않고 다만 잘 다녀오시라 안녕히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할 뿐입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대견함과 가슴아픔입니다.
그렇게 자란 정연이가 오늘 초등학교 졸업식을 하였습니다.
당신 없는 빈자리를 대신하여 선물을 사들고 먼 곳까지 와 주신 선배와 동지들… 그 사랑이 깊고 커서 우리 모두 행복하고 기뻤답니다.
하지만 당신!
아무리 메우려 하고 채우려 해도 그 넓은 졸업식장에 당신은 없었습니다.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올 수가 없었습니다. 또 휑하니 가슴을 한줄기 바람이 훑고 지나갑니다. `바보같이…` 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고 말았습니다.
편지로 축하를 대신할 수밖에 없는 당신, 그래서 오늘 하루 내내 그 어느 때보다 애달팠을 당신입니다. 정연이가 대표로 나가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미안함을 함께 느꼈겠지요. 마음은 벌써 이곳으로 달려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고 꽃다발을 안겨 주고 사진도 찍어 주었겠구요. 꿈속에라도 만나자던 당신의 말이 귀에서 맴돌고 있어요.
나 오늘 밤 그런 당신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며칠 전
너무나 아득하여 왠지 당신이 영영 나오지 못할 듯하여 울고 말았습니다. 말로는 4년 반 밖에 안 남았다 하면서도 앞으로 더 많이 남은 세월을 생각하면 솔직히 두렵기도 하고 체증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그 남은 시간동안 우리 아이들의 또다른 입학과 졸업이 있는데… 혁춘이는 초등학교에 가면 아빠가 나온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누가 묻지 않아도 학교 가면 아빠가 나와서 같이 살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데…
예쁘고 착한 우리 아이들에게 언제까지 아빠 없는 가여운 아이란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요? 언제쯤이면 우리 아이들이 당신 손을 붙잡고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요? 아빠와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닌 무엇을 했다하고 말할 수 있을런지요?
지금까지는 당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힘으로 살아 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우린 잘 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가슴이 시린 건 당신이 아이들과 같이 하지 못했던 시간들은 되돌릴 수 없고 고스란히 상처로 남고 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아빠가 절실하게 필요할 시기에 인격을 형성하고 배움을 줄 때에 아빠의 부재로 하여 아이들에게 생긴 공백은 어느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땅이 꺼지는 한숨을 토해 냅니다.
하지만 당신!
이제 더는 한숨만 쉬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지만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알면서 나 역시 당신의 동지들을 자연스럽게 나의 동지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내 곁으로 올 때쯤이면 난 아주 강해져 있을 거예요. 잘 살아내고 있을 거예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누구보다 당당하고 꿋꿋하게 당신이 감옥 문을 박차고 나올 때까지 살아갈 거예요.
2003. 2.19 당신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