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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예방약을 사기위해 약국안에 장사진을 진 사람들
사스예방약을 사기위해 약국안에 장사진을 진 사람들 ⓒ 박현숙
진열대 안에서는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예방약과 마스크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3.8 위안(한화 약 600원)하는 마스크 하나를 사는데도 20분 정도 줄을 서야 했다.

며칠전 약국을 갔었다는 방 친구는 사스 예방에 좋다는 약들은 1~2주 전보다 가격이 대폭 상승해 있더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심지어 10~20 위안(한화 약 1천5백원~3천원)하던 일반 감기약들도 60위안(한화 약 9천원)이상을 호가하고 있었다는것.

아니나 다를까. 16일자 신문들을 보니 중국 정부 차원에서 각 관련부처에 의약품값 폭등현상을 철저히 단속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다행히 마스크를 사러 들어간 그 약국에서는 아직 가격폭등 현상은 없는 듯 했다.

"지금 베이징 사람들은 온통 사스 얘기 뿐"

줄을 서는 동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휴대 전화가 끊임없이 울린다. 휴대 전화를 타고 오고가는 대화의 내용들은 모두 ‘사스’에 관한 것이다. 대화 내용으로 짐작컨데, 대부분 다른 지방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걸려온 전화인 듯 하다.

“지금, 나 약국에 있어. 여기 장난 아니다. 죄다 사스 예방약 사려는 사람들로 난리야. 우리 딴웨이(單位, 회사)에서도 마스크하고 중의약을 지급하기는 했는데 그거 갖고 어디 안심이 되야지. 베이징 사람들은 지금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온통 사스얘기 밖에 안해. 생각보다 상태가 굉장히 심각해지는 것 같아. 니네 지방은 어떠냐.”

베이징대학으로 가는 택시 안.

방금전 약국에서 산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를 쓴 채 “베이징대 갑시다” 하고 말하자, 택시기사의 얼굴에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 스친다. “이 택시 조금전에 소독했어요. 마스크 안써도 위험하지 않으니까 제발 그 마스크좀 벗으면 안돼요? 손님들이 마스크를 쓰면 내가 더 마음이 불안하다니까요. 이놈의 사스가 뭔지…”

순간 무안한 나머지 황급히 마스크를 벗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내키지 않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방금 약국에 갔는데 사람들이 다 사스 예방약을 사려고 난리던데, 아저씨는 뭐 특별히 예방약 먹는게 있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택시기사가 운전좌석 아래쪽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조그만 알약통이다.

“신문 보니까 사스예방에 좋다는 약들이 몇가지 소개되어 있길래 이틀전에 샀어요. 기침감기 예방도 되고 면역력도 키우는 약이라나 뭐나. 그냥 뭐 마음이라도 불안하지 않을려고 산거죠 뭐. 이게 무슨 특효약이 되겠어요”

“요즘 신문이나 TV 보면 온통 다 사스 얘기밖에 없던데…”. 그러자 갑자기 택시기사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난리를 떤다고 몇 달동안 퍼진 병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나. 이게 다 초기에 전염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쉬쉬한 정부하고 언론탓이라고요. 광동성에서 이미 작년 11월부터 병이 발생했다는데, 그게 올 초에 서서히 사람들 입을 통해 퍼져 나가니까 그때 정부나 언론에서 한 소리라는게 뭔지 알아요?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잡아간다느니, 특정 의약회사가 악의적으로 조작한 소문이라느니 하면서 입막음하기 바빴다구요.

베이징에서 3월초에 첫 환자가 발생했다고 들었는데, 만일 그때라도 정부가 사실대로만 공개했어도 사태가 이 지경이 안되었을 거요. 이젠 정부나 언론에서 아무리 뭐라고 떠들어도 사실대로 안 믿어요. 오히려 사람들 입소문이 더 믿을만 하다니까요.”


베이징에 떠도는 공포의 ‘사스 괴담’들

마스크를 쓴 꼬마
마스크를 쓴 꼬마 ⓒ 박현숙
택시가 중관촌(中管村)을 지나가고 있다. 중국 IT산업의 메카라고 불리는 중관촌은 빌딩 숲들로 빽빽한 베이징의 상업 중심 지구다.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보이는 중관촌 거리는 온통 마스크를 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사스가 확산되면서 최근 베이징에 나도는 온갖 공포의 ‘사스 괴담’들 상당 부분이 이곳 중관촌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중관촌에 위치한 모 한국 IT회사에 근무하는 한 주재원에 따르면 요즘들어 매일 인터넷 메일을 통해 갖가지 ‘괴담’들이 들려오고 있다고 한다.

앞 빌딩 모 회사에서 사스 환자가 발생해서 그 회사 발칵 뒤집혔다더라, 모모 IT회사에서도 직원 한명이 사스에 걸려 죽었다더라, 조만간 중관촌 일대가 봉쇄된다더라 등등. 쉬는 시간마다 직원들이 모여 매일매일 새로 받은 메일 ‘괴담’들 얘기로 분위기가 흉흉하다고 한다.

중관촌 일대에 이런 괴담들이 밑도끝도 없이 퍼져나가자 급기야 중국언론에서도 ‘괴담 수집’에 나섰다. 중관촌에 나도는 각종 소문들을 수집, 취재해서 “봐라, 실제 취재를 했더니 다 사실무근이더라. 아직 중관촌에는 사스에 걸린 환자가 한 명도 없다. 모든게 다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하고 보도를 한 것.

그러나 한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과 괴담들은 좀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지난 1~2월초 광동성 일대를 뒤덮은 악성 소문의 양상과 비슷하다. 당시는 중국정부가 아직 공개적인 대응을 하기전이라 휴대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은밀하게 확산되었던 반면 현재 베이징 일대를 뒤덮고 있는 사스 관련 소문들은 정부나 언론의 공식적이고 대대적인 ‘공개’대응 이후에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는 꼴이어서 그 양상이 자못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방금전 택시기사의 말처럼 ‘원죄’는 애초에 솔직하게 진상을 공개하지 않은 중국정부와 언론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매일 언론에 공표되는 정부의 사스 관련 환자 통계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특히 최근 들어 일반병원과 군병원 내 사스감염 환자 보고체계가 달라서 군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통계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정부통계 발표에 대한 불신임은 극에 달하고 있다.

베이징시 정부는 19일경쯤 지금까지 통계에서 누락된 군병원내 환자수까지 포함한 새로운 통계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난 17일 열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사스 전염병 상황에 대해 절대로 은폐 보고를 해서는 안된다”고 엄중하게 ‘지시’를 내렸다.

베이징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휴대 전화가 울렸다. 중국인 친구다. “어제 회사에서 사원들 정기 교육받는 날이었는데 취소되었어. 교육장소로 쓰기로 했던 대학에서 사스 환자가 발생했다나 봐. 너도 조심해라”

밤에도 이와 비슷한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우따오커우(베이징의 대학가 밀집거리)가 난리가 났대요. 주변 몇몇 대학 학생들이 사스에 감염되었다나 봐요.”

대학교정 곳곳에 마스크를 한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다.
대학교정 곳곳에 마스크를 한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다. ⓒ 박현숙
공포로 뒤덮이고 있는 베이징대 교정.

베이징대 교정은 화사한 봄날씨답지 않게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다. 들썩들썩해야할 캠퍼스 분위기는 침울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도서관 앞에도 학생들이 한 명도 없다. 도서관 정문앞에는 소독관계로 임시 폐관을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캠퍼스를 오고가는 학생들도 ‘입’을 막았다. 대부분 마스크를 낀 채 무표정하게 걷고 있을 뿐이다.

지난 15일 이 학교 교직원중 한 명이 사스에 감염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베이징대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경제학과와 국제관계학과는 4월 16일부터 5월5일까지 수업을 중단한다는 공식 통지문을 학생들에게 보냈다.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한국유학생 여경훈씨가 이메일을 통해 받은 ‘학교내 긴급통지’서에는 “수업정지는 학업정지가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통시설은 쉽게 병을 전파시킬 수 있고 베이징은 이미 (외지인들의) 유입(流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되돌아 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모두들 5ㆍ1 노동절 휴가 기간에도 최대한 기숙사내에 머물도록 하고 외출을 줄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여경훈씨와 같은 방을 쓰고 있던 일본인 방 친구는 이틀전 황급히 ‘귀국’을 했다고 한다. 이외에 일본인 유학생들 상당수도 이미 귀국을 한 상태라고 하며, 베이징대내 한국인 유학생들도 귀국을 서두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학교내에서 사스감염 환자가 발견된 이후 베이징대는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로 빠졌다. 베이징대 인터넷 홈페이지(www.pku.edu.cn)에 마련된 사스관련 전문 게시판에는 각종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비탄, 정부의 대응정책을 비판하는 글들로 가득차 있다. 그 중 한 학생은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방금 우리 부모님께 또 전화를 해서 그곳의 사스상황을 여쭤보았답니다. 근데 대답은 여전히 일주일전과 다를바 없었습니다. 부모님 왈 ‘전염병은 단지 광동에만 있고 이미 통제가 되었다더라’하시더군요. 매일 뉴스를 보는데 우리 고향은 아무일 없다고 말씀하시지 뭐예요. 그래 내가 그랬지요. 제발 조심하세요. 심지어 베이징에도 퍼졌다구요. 그런데 가족들이 내말을 믿지 않는겁니다. 하마터면 참을 수가 없어서 핏대를 올릴뻔 했죠.

지금은 그 어느누구도 믿을수 없는 상황인데도 우리 가족들은 정부가 신문이나 TV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더라구요. 근데 왜 정작 가족인 내 말은 못 믿는건지. 아니 죽음이 임박해질 때라야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릴려는지…“


학교에서 지급하는 예방약을 받기 위해 줄을 선 베이징대 학생들
학교에서 지급하는 예방약을 받기 위해 줄을 선 베이징대 학생들 ⓒ 박현숙
오후 5시 무렵 베이징대 교정 곳곳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학생들이 줄을 늘어서기 시작했다. 별다른 웅성거림없이 모두들 차분히 줄을 서 있다. 학교 보건소에서 지급하는 사스예방약을 받아먹기 위한 줄이다. 15일 이후 베이징대에서는 매일 이렇게 학생들에게 약과 마스크를 지급하고 있다. 또 학교안에는 마스크와 사스예방약, 공기정화향을 파는 각종 장사치들이 들어서 교정 분위기를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줄을 서 있는 학생들의 눈빛에서는 별다른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베이징대 교정안의 눈빛들은 그렇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베이징시, 사스와의 ‘인민전쟁’ 시작

주택가 게시판에 붙은 사스예방지침서
주택가 게시판에 붙은 사스예방지침서 ⓒ 박현숙
아침부터 빗발치기 시작한 전화가 밤이 되어도 끊이질 않는다. 전화를 건 용건은 다들 ‘사스에 주의’하라는 거다.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는 목소리들은 한결같이 걱정과 긴장, 불안들로 가득차 있다. 며칠내로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주변 한국인 지인들은 한숨만 내쉬고 있다. 도대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확대된 건지 알 수가 없다며 계속 확인할 수 없는 새로운 ‘괴담’들을 들려준다.

그 사이 한 중국인 할아버지에게서 또 한 통의 안부전화가 걸려왔다. 당분간 찾아올 생각은 하지 말고 집에서 조심히 쉬고 있으라는 당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강조의 말씀인즉,

“해방 이후(신중국 성립 이후) 얼마되지 않아 베이징에 아주 지독한 유행성 독감이 돈 적이 있어. 그때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아주 어려운 시기였어. 그때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사람들을 만나는걸 두려워 했으니까. 우리 세대는 그것 말고도 몇 만명이 굶어죽었던 자연재해에다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을 겪어왔어. 그것들을 겪으면서 생각한게 뭔지 아니. 정말로 무서운 것은 병이나 굶주림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마음이 단절된다는 거야. 정작 무서운 것은 바로 그거라고.”

통화 도중 얼핏보니 켜놓은 TV에서 사스관련 생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베이징 TV에서 내보내고 있는 특집방송이다. 전화를 끊고 또 걸려오는 전화들을 받는 중간중간 ‘구경’하는 방송내용을 보자니 드디어 베이징시가 사스와의 ‘인민전쟁’을 시작한 모양이다. 전쟁보도와 다를 바가 없다.

전화를 받는 사이 TV속 사회자의 가슴 밑으로 얼핏 스쳐가는 자막이 눈에 ‘박힌다’. “사스예방퇴치와의 인민전쟁에서 승리하자”. 중국내 사스 관련보도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인민전쟁’이라는 용어다.

2003년 4월, 베이징은 그렇게 사스와의 ‘인민전쟁’을 선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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