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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소위 금융실명제가 제도화되고 본격화되면서 고위 공직자들이 자진해서 재산 공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국무위원들과 국회위원들은 자신들이 소유하는 부동산과 재산에 대해 공개하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재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국무위원들과 국회위원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재산을 밝히고, 상대적으로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재산을 줄여서 신고할까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러면 기자들이라는 사람은 남의 구린데 찾아 까발리고 또 여·야당에서 서로 상대진영에서 재산공개를 줄여서 발표했다고 설전이 오고간 적이 있었습니다. 코미디 같은 얘기가 실제 벌어졌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자신들의 재력을 한껏 뽐내고 으스대면서 권력과 재력의 위력에 탐닉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재산을 줄여볼까 궁리를 하고 재산을 많이 가진 것이 떳떳하지 못하고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을 많이 가진 게 무슨 흉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소위 고위 공직자들이란 사람들이 무슨 수로 그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거지 부자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거지부자가 해거름 산모퉁이에서 저녁노을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 동네 김 부자 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거지 부자는 저녁노을을 구경하는 것보다 불구경이 훨씬 더 재밌어서 김 부자집네 불구경을 했습니다.
삽시간에 번진 불은 김 부자네 기와집을 모두 태우고 잿더미만 남게 되었습니다. 김 부자는 잿더미에 털썩 주저앉아 체면 불구하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거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야, 이 녀석아! 너는 아비를 잘 만난 줄 알아라.”
“왜요?”
“우리는 집도 절도 없으니 불탈 염려도 없고, 얼마나 좋으냐? 그러니 너는 애비를 잘 만난 것이 아니냐?”
신학교 시절, 나는 갈등과 객기의 나날을 지냈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게 없었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구조악과 대항할 만한 보루(堡壘)가 되고 있는가? 오늘의 교회가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그런 물음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한국교회가 너무 부자로 보였습니다.
성서에서 만난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이신데, 교회는 부(富)를 축적하여 대형화되는 것이 교회의 모델로 인식되었습니다. 나는 고민하며 방황했습니다. 남들은 4년이면 졸업하는 걸 나는 6년이 넘게 걸려 간신히 턱걸이로 신학교 문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때 결심이 ‘그래,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목회자가 되자’. 그래서 선택한 것이 농촌 목회였습니다. 그때 나의 삶의 초점은 E.H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모아졌습니다. 그 책을 탐독했고 그 다음의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장자(莊子)>였습니다. 책 표지가 닳도록 읽었습니다. 어찌 보면 위의 3권의 책이 나의 방만한 삶과, 나의 삶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설정해 준 책이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내가 20년 전 발견한 삶의 표지였습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달란트의 비유’가 유명합니다. 그 얘기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5달란트 받은 사람, 2달란트 받은 사람 1달란트 받은 사람, 세 사람 중에 누가 제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5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현대인들은 물량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고, 재화(돈)의 토대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당연히 5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게 당연합니다. 제일 많이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관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5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2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똑같이 칭찬을 하십니다.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 25,21 .23)
작은 것을 소중히 볼 줄 아는 마음, 그런 마음이 현대인들에게 없습니다. 모두 많이 가지려고만 합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누가 더 많이 갖느냐? 그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작은 것 소중히 보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을 한국 교회는 보지 못합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나눔과 섬김에는 인색하고 마치 고리대금업자처럼 부를 축적하려고만 합니다.
멀쩡한 예배당을 부수고 더 크게 짓고, 차를 많이 세우기 위해 근처의 땅을 야금야금 주차장으로 사들이고, 그리고는 평일에는 아무도 이용하지 못하게 교회 문을 걸어 잠급니다. 경치 좋은 데는 부동산 업자를 끼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용도 변경을 하고 산림을 훼손하여 기도원을 짓습니다. 동네 주민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자랑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작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의 덕목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가난의 영성’에 대해 관심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첨탑은 점점 높아져 갑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이 사회와 멀어져 갑니다.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복음이 선포될 뿐입니다.
그 동안 20년 가까이 농촌 교회를 섬기면서 느끼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부터 그렇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볼 줄 아는 마음, 그리고 가난의 영성이야말로 예수를 선포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내가 발견한 삶의 표지는 ‘느림’이라는 표지입니다. 현대사회는 속도와의 전쟁입니다. 무엇이든지 후딱 해치우고 맙니다. 밥을 먹어도 후딱 먹고, 길을 걸어가도 천천히 걸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빨리빨리’입니다.
‘빨리빨리’는 외국사람들도 다 알아 듣습니다. ‘빨리빨리 문화’는 군관산복합체(軍官産複合體)의 결과를 빚어진 저급한 문화의 병리현상입니다. 군사정권이 소위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경제성장의 속도전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경제의 많은 성장을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경제개발 이데올로기는 또한 많은 부작용을 가져 왔습니다.
빨리 간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느냐? 그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확인하기 위해서 좀더 느리게 가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느리게 간다고, 천천히 간다고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우리집 은빈이가 집에서 학교까지 15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데 천천히 걸어서 30분 이상 걸리는 거예요. 애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은빈아, 너. 왜 그렇게 학교를 천천히 가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은빈이가 “아빠, 내가 느리게 가니까 가다가 꽃도 보고, 나비도 보고, 벌레도 보고, 벌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움직이는 것도 보고, 또 가다가 구름도 보고, 나무도 보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러니까 참 좋아!”
천천히 느리게 가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고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작은 것을 소중히 보는 마음을 통해 삶의 간소함을, 좀 더 느리게 사는 삶을 목회(牧會)에 적용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