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김두한을 기억하시나요? 오물통을 앞에 두고 연설 중인 김두한.
장수도 이런 장수가 없다. 길어야 몇 개월 버티기 힘들다는 드라마가 1년간 계속되고 있다면 결코 짧은 수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는 29일(화)이면 돌을 맞는 드라마가 있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SBS의 <야인시대>.

‘사랑도 명예도 중요하지 않다’던 어린 김두한(안재모)이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은혜’가 좋아하는 <남자의 향기>가 진정 무언인지 알기 위해서인지 야인들의 시대를 떠난 이후 김영철이 ‘외로운 도시를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 혹시 기억하는가? 적잖은 이들이 식당 주인 눈치 보며 봤던 <야인시대> 제1편.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똥이나 쳐 먹어, 이 개새끼들아!”

단상에 올랐던 김두한이 갑자기 육두문자를 허공에 날리며 국무총리 정일권과 부총리 장기영이 앉아있던 국무위원석을 향해 오물통을 던지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관련
기사
그의 깡패질은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당시 김두한은 제6대 국회의원으로 금빛 찬란한 배지를 달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1966년 9월 15일 당시 국내 최대 재벌이던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우리 사회가 큰 파문에 휩싸이게 됐다. 이에 대정부 질문이 있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날, ‘두렵지 않는 뜨거운 가슴’을 지녔다던 김두한이 ‘바람처럼 스쳐가는 정열’ 때문이었는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오!물!투!척!

▲ 제6대 국회의원이던 김두한이 1966년 9월 15일 국무총리 정일권과 부총리 장기영에게 오물을 던진다. 그나저나 그 사건이 벌어진 곳은 어디일까?
그런데 여기서 생뚱맞은 질문 하나. 과연 김두한이 오물을 던진 장소는 어디일까? 당시 김두한은 국회의원이었고, 대정부 질문도 진행 중이었으니 정답은 물론 국회였을 것이다. 그러면 성처럼 으리으리한 데다가 일반인들은 함부로(?) 정문 출입도 하기 힘든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라는 얘기일까?

서울시청 근방은 한국 권력의 메카

서울시청 앞 광장은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의 메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에는 효순이와 미선이의 한 많은 삶을 달래기 위한 촛불 시위와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었던 월드컵의 붉은 물결이 휩쓴 바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4.19당시 수많은 인파가 몰려 나왔던 곳도 시청 앞 광장이요, 1987년 6월 이한열의 장례식 당시 분노한 인파가 몰려든 곳 역시 시청 앞이었다.

▲ 부민관에서 미 군정청 건물, 시민관,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 서울시의회.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 권기봉
또 자천 타천 권력이란 권력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몰려 있는 곳이 서울시청 근방이다. 행정 권력을 의미하는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가 인근이요, 사법 권력을 의미하는 대법원이 근처에 있었고 이후 이사를 가기는 했지만 역시 그리 멀지 않다. 또 태평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를 튼 ‘ㅈ’일보나 ‘ㄷ’일보 등의 언론 권력과 각종 상업자본들의 본사가 높은 빌딩 숲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이곳 서울시청 근방이다. 게다가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 대사관까지. 그런데 하나가 빠졌다. 입법 기관 국회가 보이질 않는다. 국회에 가려면 가뜩이나 불어난 한강을 건너야 하는 걸까?

대한민국 국회도 서울시청 옆에 있었다

대한민국 국회 역시 서울시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김두한이 ‘바람처럼 스쳐가는 정열’로 오물을 던진 곳도 여의도가 아닌 시청 근처에 있던 국회였다.

▲ 지금은 그저 외벽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 원래 첨탑에는 시계가 걸려 있어 시계탑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 권기봉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오면 경운궁(덕수궁) 앞이다. 여기서 태평로를 따라 세종로 쪽으로 150m 정도 걷자. 그러면 경운궁 담장이 끝나면서 영국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왼쪽으로 나오는데 곧장 걷자. 그러면 바로 앞에 ‘서울시의회’라고 쓰여진 건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부터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이사 가기 전까지 근 20년간 국회 건물로 이용된 건물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부터라고? 그럼 그 이전에도 어쨌거나 다른 용도로라도 쓰이긴 했다는 말일 게다. 그럼 무엇이 있던 것일까?

일제시대판 세종문화회관에 날아든 폭탄 두 개

원래 흥천사(興天寺)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인데, 1935년 12월 부민관(府民館)이라는 이름으로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처럼 각종 문화 행사들을 위한 시설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건립 당시 본관 홀과 중강당, 소강당, 식당 등 문화 활동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는데, 그‘문화’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친일 성향의 예술 공연이나 각종 정치 집회 등이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례로 국립현충원에 있는 박정희 묘비에 새겨져 있는 추모시를 쓰기도 했던 모윤숙이 1941년 12월 27일 부민관에서 열린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은 전사다”라는 연설을 한 바 있다.

▲ 서울시의회 청사 앞에는 이렇게 쓰여진 표지석이 한 기 놓여 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 – 1945년 7월 24일 애국 청년 조문기(趙文紀), 류만수(柳萬秀), 강윤국(康潤國)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 권기봉
그런데 건물 바깥에 표지석이 하나 서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 1945년 7월 24일 애국 청년 조문기(趙文紀), 류만수(柳萬秀), 강윤국(康潤國)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당시는 해방 직전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의 한계를 절감하던 시기로, 이른바 옥쇄의 기치 아래 매진하던 때였다. 때가 때이니 만큼 친일 인사들도 가만있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표지석에 쓰여 있는 대로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는 친일파 박춘금이 만든 ‘대의당(大義黨)’ 주최로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정운현의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의 개회사에 이어 좌장으로 와타나베를 선출한 후 일본, 중국, 만주의 대표 5명과 박춘금의 강연을 마치고 제2부 순서로 ‘남녀청년분격웅변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때 갑자기 두 개의 폭탄이 행사장에 날아든 것이다. 1945년 7월 24일 오후 6시경.

▲ 관동대지진 당시 일제와 함께 조선인 색출에 앞장섰던 박춘금. 일본 중의원까지 지냈으며, ‘대화동맹’에 이어 ‘대의당’이라는 친일 단체를 조직했다. 이광수나 김동환, 주요한 등도 이 단체의 회원이었다.
대의당 당원 1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때 폭탄을 던진 사람 중 한 명인 조문기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친일 행위의 구조와 실체 밝히기와 반민족 행위에 대한 연구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순환하는 역사, 그 사이에 어떤 발전을 이루었나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일제 시대에는 부민관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친일 성향의 인사들의 주요 모임 장소로 애용되던 이 건물은 해방이 되자 미 군정청이 사용하게 된다. 이후 1949년 7월 서울시에 반환된 이 건물은 시민관으로 이름이 바뀌고 같은 해 10월 3일부터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된 것이다. 당시 반민족 행위자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지 않았기에, 적잖은 친일파가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면서 이들이 자주 드나들었을 부민관에 결국 국회가 입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까.

이 부적절한 관계를 증언해주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1954년 11월 27일의 이승만 종신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곳이며, 국가 보안법이 1958년 12월 날치기로 통과된 곳도 이곳이다.

이승만은 가도 역사는 그대로 흐르는 것인지 5.16 군사 쿠데타 당시 국회 간판을 떼고 ‘재건국민운동본부’ 간판을 달았던 곳 역시 이곳이다. 이후 한일협정비준 파동과 3선개헌 파동, 8대 국회 당시의 10.2 항명 파동, 국가보위법 파동 등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정운현은 같은 책에서 말하고 있다.

▲ 일제 시대 당시 부민관에서 열린 아악 공연. 악사들 뒤로 대형 일장기가 보인다.
이 건물은 일제에 이어 주인이 된 국회가 1975년 8월 여의도로 둥지를 옮겨가면서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쓰이게 된다. 일제 시대의 ‘문화 행사’도 그렇지만 70년대 당시의 ‘문화 행사’라는 것도 결국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의식화 행사에 다름 아니었기에 일제 시대 당시의 ‘의식화를 통한 문화 창달’ 수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는 당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문화’보다는 위로부터 미리 계획된 ‘행사’에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이후 지방 자치제의 확대 실시로 인해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91년 7월부터 서울시의회로 쓰이게 되었다. 어찌됐건 문화 시설에서 입법 시설로, 거기서 다시 문화 시설로 바뀌었다가 의회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순환하는 역사 속에 과연 어떠한 발전을 이뤄내고 있는지 궁금한 대목이다.

많은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었다는 지금도 의회는 토론과 합의의 장이라기보다는, 비록 실제의 오물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라지만 오물보다도 더 상스럽고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국회 역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서로 핏발 세워가며 투쟁하는 전투의 공간이자 상극 대결의 공간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볼 일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면 좋은 일이지만 꼭 그러라는 법은 없다. 제 아무리 사정이 좋더라도 헌 부대도 큰 하자 없고 쓸만하면 잘 고쳐 쓰면 되는 것이다. 새로 담근 술을 새 부대에 담든 헌 부대에 담든 그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다만 지금 그 술을 담고 있는 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알고, 또 어떤 악취가 베어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어린 김두한이 이 부대로 은혜를 보쌈이라도 할라치면 어떡하지?)

부민관 찾아가는 방법
지금은 서울시의회 청사로 쓰이고 있어

▲ 서울시의회 청사 찾아가는 방법
ⓒ권기봉


서울시의회 청사를 찾는 것은 사막에서 모래 찾기와 같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오면 경운궁(덕수궁) 앞이다. 여기서 태평로를 따라 세종로 쪽으로 150m 정도 걷자. 그러면 경운궁 담장이 끝나면서 영국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왼쪽으로 나오는데 조금만 더 걷자. 그러면 바로 앞에 ‘서울시의회’라고 쓰여진 건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도에서 빨간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건물이다.

지금은 외벽만이 남아 있어 그저 ‘자리’ 혹은 ‘겉모양’으로서의 의미밖에 없지만,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동안 온갖 영욕을 거쳐온 건물이라는 점에서 한번쯤 눈여겨봐줄 만하다. / 권기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