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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 배우고 싶었던 3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가 사진이었다. 아직도 멀었지만, 그래도 사진의 맛을 조금 경험한 셈이니 사진은 그만하면 되었고, 그 다음이 기타와 피아노였다. 나는 기타 소리도 좋아하고 피아노 소리도 좋아한다.
한동안 시(詩)습작을 하던 시절에는 하루에도 서너 시간 이상 음악을 들었고, 클래식 음악 중에도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음악에 심취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피아노 연주가라도 된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불현듯이 ‘이제라도 피아노를 배울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니, 늘 생각으로만 머물고 말게 된다.
나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셨다. 어머니는 강원도 철원 장흥리가 고향이셨는데, 유년시절 교회에서 좋은 음악 선생님을 만나게 되셨다. 안시영 선생이라는 분이셨는데 김화 창도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 무슨 곡절이 있으셨는지 모르지만 잠시 철원으로 내려와 계시던 중에 장흥교회를 나오시게 되었고, 거기서 청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안시영 선생은 형제가 7형제가 있었는데, 당시 모두 쟁쟁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안시영 선생으로부터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배우다 6.25전쟁 통에 헤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안시영 선생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안시영 선생으로부터 음악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셨던 어머니는 그 후 아버지(朴應男)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박봉의 경찰관이셨고, 시어머니는 중풍에 치매까지 겹쳐서 어머니는 10년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살가운 분이 아니셨다. 거기다 지방출장근무를 오래하시고 퇴직 후에는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으셔서 나의 어머니는 이중삼중의 질고를 혼자 감당하면서 집안을 이끌어 가셨다. 그런 가난한 집안에 우리 4남매가 태어났다.
우리 집안의 유일한 생계의 근거의 어머니의 재봉틀이었다. 어머니의 손재봉틀은 하루도 쉬지 않고 ‘스르륵’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고, 어려서 피아니스트가 꿈이셨던 어머니는 피아노 대신 재봉틀을 돌리셨다.
그 때 우리 집은 철원에서 화천으로 이사와 ‘논미리’라는 산촌(山村)에 자리를 잡았는데, 어머니는 나무판자(板子)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그걸 치셨다. 소리 안 나는 피아노였다.
어머니는 처녀 적 피아노 실력은 찬송가를 틀리지 않고 4부로 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아이들에게 밥을 퍼주고 나면 어머니 몫은 없었다. 냄비에 달라붙은 누룽지가 고작이었다. 매우 빈한한 생활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지 않으셨다.
그것이 전혀 현실성이 없는 꿈인 줄 알면서도, 우리에게 여러 차례 ‘엄마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한참 나중에 신앙적인 계기로 말미암아 다행히 집안의 가장으로 복귀(復歸)하게 되면서 우리 집안은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꿈이 피아니스트였노라고, 이제라도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그러면서 나무판자 피아노를 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그 때가 내가 중학교를 막 진학할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든 피아노를 사주시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하셨다. 그 당시 피아노 한 대 값은 시골에서 집 한 채 값이었다. 화천읍에 피아노가 딱 두 군데 밖에 없었다. 화천국민학교와 화천중고등학교였다.
아버지는 그간에 자신이 한 가정에 가장으로 부실했던 당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어느 날 아버지가 서울에 가셔서 큰 마음을 먹고 풍금(아리아 오르간)을 사 갖고 오셨다. 어머니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풍금에서 떠나지 않고 찬송가를 치셨다.
하도 오래 가위질을 하셔서 손가락이 굳어 잘 안 펴지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 집 식구들이 나가던 교회에서 어머니는 저녁 예배에 반주를 하셨다. 그리고 나의 누나(文淑)인, 딸에게 악보 보는 법을 가르치시고,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비교적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가 드디어 피아노를 사오셨다. 피아노를 사오던 날은 대단했다. 누나가 처음으로 온 집안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 배운 곡을 연주하는데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 넋이 나가 쳐다보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누나는 음대를 갈 목표로 하고 피아노를 치는데, 하루 종일 밥 먹는 시간 외에는 피아노에 매달려서 살다시피 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실기 위주로 피아노를 배웠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던 피아노 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시끄러운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피아노 소리를 듣다보니 얼마나 그 소리가 지겹든지 누나와 많이 싸웠다.
누나는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음대 피아노과를 갔다. 그 시절 나도 자연스럽게 누나의 영향을 받아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누나의 피아노 소리에 질려서 나는 피아노로부터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일부러 피아노와 담을 쌓고 지냈다.
세월이 많이 지나 옛날 누나가 지겹게 두드렸던 피아노 소리가 나는 다시 듣고 싶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클래식 음악에 끌려 레코드판을 구입하게 되었다.
지금은 간편하게 CD가 나오고 인터넷으로도 구입하기가 용이해 졌지만, 예전에는 일부러 레코드점에 가서 레코드판을 사러 갔다. 레코드판 수가 늘어나는 것이 뿌듯했다. 한 장 한 장 사 모은 것이 백여 장을 넘게 모았다. 레코드판을 사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축에 올려놓고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음악의 세계에 깊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피아노를 배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이 나로 하여금 지치고 메마른 영혼에 단비와 같은 생명력을 부어준다. 그 생기에 도취해서 어느 때는 음악이 내 신체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밤중 전깃불을 다 끄고 촛불을 키고 향을 피우고 녹차를 마시면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 일체의 욕심이 사라진다. 나 자신이 참으로 외소하게 느껴진다. 음악은 나의 내면을 정화하게 만들어주고, 모든 사물이나 자연을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
그런 느낌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질수록 나는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다. 나의 어머니가 가졌던 소녀시절 피아니스트에 대한 꿈이 나에게 전이(轉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피아노에 대한 그리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 나이 쉰이 다 되어서 누리게 되는 삶의 여유일까? 아니면 음악을 구실로 나의 내면을 발현(發顯)하고 싶은 극히 사적인 욕심일까? 아무튼 나는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