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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기봉
여름이 매한가지겠지만 지난 여름은 특히 덥고 습했던 것 같다. 잠시 도망이나 가볼까 하고 바다로 계곡으로 떠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꽉 막힌 도로에서 지치고 북적대는 사람들에 치이고… 그리 유쾌했던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며칠 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밤에 창문을 열고 자는 것도 이제는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한가위가 10여 일밖에 남지 않은 걸 보니 진정 가을로 접어든 것인가?

온전한 쓸쓸함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떠날 터다

ⓒ 권기봉
가을. 가을은 쓸쓸하고 외로운 계절, 동해의 일출보다는 서해의 낙조에 취하는 계절이다. 누가 뭐래도 소식 끊긴 친구가 그리워지고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부모님이 보고 싶어 지는 때가 바로 가을이 아닐까. 또 헤어진 옛 연인을 떠올려보는 미련함을 버리지 못하는 계절도 바로 가을. 가을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을은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를 강요한다.

왠지 가을이면 인기척 없는 폐사지로 발걸음을 돌린다. 매년 어기지 않는 습관인 것 같기도 하다. 매점 하나 없고 찾아가는 데도 분명 애를 먹기 마련이지만 그곳에 가면 온전한 내가 있고 허울을 벗어버린 인간 자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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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할 때 이런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자칫 궁상맞고 처량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청승을 떤다는 것이 필히 나쁜 뜻은 아닐진대 일부러 아닌 척 할 필요는 없잖은가? 때로 외롭고 지쳐 헤어나기 힘들 시간이 오면 오히려 온전한 쓸쓸함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떠날 터다.

경기 양주에 회암사터가 있었네

경기도 양주. 별산대놀이로 유명한 양주의 회천읍에 가면 한때 조선 최대 왕실사찰로 격을 높이던 절터가 하나 있다. 회암사(檜巖寺)터.

ⓒ 권기봉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약 200여 년 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제1의 사찰로서 위상을 높이던 회암사는, 그러나 그 영욕은 지금 온데간데 없다. 그저 적막한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웅장한 금당도 그 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은 범종루도 없다. 가을을 준비하는 풀벌레와 한 겨울을 버텨낼 양분을 저장하는 듯한 나무들의 속삭임만이 들릴 뿐. 한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1328년 고려 충숙왕 15년 당시 인도에서 온 지공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고려 중기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회암사. 모두 262칸의 전각들로 이루어졌던 동방 최대의 가람이라고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목은 이색은 말하고 있다. 실제로 입구에서부터 산허리를 타고 앉은 회암사의 규모와 큼직큼직한 석재들은 예산 보원사터 등 다른 폐사지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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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회암사는 조선의 창건과 관련해 재미난 이야기를 품고 있어 다시 한 번 눈여겨 보게 된다. 조선 개국에 관여했던 무학대사가 머무르던 사찰이 바로 회암사로, 태조를 만나게 된 것도 이 절이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설봉산 토굴에 있던 무학을 찾아와 꿈 해몽을 청하거늘, 앞으로 왕이 될 운명이니 입밖에 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청년이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태조가 무학에게 새 도읍을 정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생무상 권력무상. 이후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조가 머무르던 곳도 바로 양주 회암사다.

폐허미를 한껏 받아들이다

회암사의 느낌은 막막하지만 장대하다. 비록 남아 있는 전각 하나 없다지만 지천에 널려있는 온갖 석재들은 크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앞쪽 모퉁이에 서있는 당간지주와 소맷돌, 질서정연한 석축은 옛 영화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끔 한다.

특히 사람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금당이 있었을 법한 폐사지의 중심 부분이다. 보통 크기가 아닌 박석과 장정의 가슴팍에 와닿는 석축은, 만약 목조 건물도 남아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온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또 뛰어난 조각기술로 만들어 놓은 부도는 그 정교함이나 크기 면에서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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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회암사터 왼쪽에 난 길을 따라 1km가 못 되게 올라가면 회암사가 있다. 회암사가 있는데 왜 폐사지라 부르는지 반문할 수 있겠다. 지금 말하는 회암사는 본디의 회암사라기보다는 애초 암자였을 정도로 작은 편이다. 그냥 회암사라는 이름이 좋아, 그 화려했던 과거가 좋아 일단 갖다 붙인 이름쯤으로 받아들이자. 실제로 이 절은 1828년 순조 28년에 들어서야 창건된 사찰이다.

이곳에 오르면 지공화상 부도와 부도비, 석등 등이 중간쯤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어 나옹선사의 부도와 부도비, 역시 석등이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고,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 부도비 일부가 남쪽에 남아 있다. 조각 기술을 떠나 아담한 모습에 마음이 편해진다. 위세를 거들먹거리지 않고 길손을 푸근하게 맞아주는 손길에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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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사찰 회암사, 결국 소멸되다

보다시피 현재 회암사는 폐사지다. 나옹화상이 진리를 깨달은 절답게 내로라하는 이들이 거쳐간 회암사도, 그러나 정해진 운명이 있었나 보다. 경복궁 등 궁궐에서나 나오는 청기와가 출토되고 연산군 당시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던 대사찰 회암사였지만, 좋은 묫자리를 얻으려는 지방 토호들과 화재 등으로 인해 결국 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명종실록>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명종 21년; 1566년)는 기록이나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선조 28년; 1595년)는 기록 등이 나오는 것을 보면 1566년과 1595년 사이에 불에 타 폐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 97년부터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과 경기도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결과, 폐사의 원인은 화재였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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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 전시회와 답사 프로그램 이용해 볼 만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오는 것이 관광이라면, 여행은 자신이 직접 식단을 꾸린 후 밥상을 차려 식사를 하는 것일 게다. 불국사나 석굴암 등은 관광 코스로서는 제격이다. 준비를 하지 않아도 자료나 교통 면에서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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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발가벗은 자기를 느껴보고자 떠나는 폐사지 여행은 알아서 밥상을 차려야만 한다. 회암사터를 찾아가기 전에 참고할 만한 정보가 있어 소개한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경기도박물관(www.musenet.or.kr)에서는 ‘묻혀있던 조선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불교문화전’을 열고 있다. 오는 10월 5일까지 계속될 이번 전시회에는 회암사터 관련 유물 250여 점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또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오는 31일 회암사 답사를 나간다. 그런데 마냥 좋아하지 말 일이다. 이미 예약이 끝나 남은 자리는 짐칸밖에 없다고 하니 말이다. 조금 기다렸다가 9월 28일 제2차 답사 프로그램을 고려해볼 만하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경기도 박물관 유물관리부(031-288-5380~5387)에 사전 접수를 해야 한다.

한편 떠나기 전에 미리 회암사터 홈페이지(www.hoeamsa.co.kr)에 들어가 지도 정보 등 각종 자료를 참고하는 것은 상식인데, 토요일과 일요일에 회암사터를 찾을 이라면 양주별산대놀이를 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에 무료 공연이 펼쳐지는데, www.sandae.com에서 신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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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낙엽 떨어지는 한 가을에 폐사지에 들었다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막 가을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지금이 폐사지를 돌아보기에는 제격이다. 가로막는 것 없이 탁 트인 폐사지에 서면 일단 덕지덕지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에서 솔직함을 만날 수 있고, 폐허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상함을 느낄 수 있다. 온전한 자기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주말에는 폐사지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 양주 회암사터로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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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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