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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으면 종묘를 찾아가십시오. 시끌벅적한 종로거리를 헤매다 정문에 들어서면 고요한 공간이 세파의 때를 씻어줍니다. 한적한 오솔길을 걷다가 정전을 바라보면 그 거대한 규모에 놀라고 단조로운 조형기법에 겸손을 배웁니다. 장식을 최대한 억제하고 수수한 단청, 문양 등이 절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 종묘랍니다. 그만큼 종묘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며 정통성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이 완공된 후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신 것이 종묘의 시작입니다.

▲ 하마비
ⓒ 이종원

하마비

정문 들어서기 가장 먼저 보아야 할 유물이 '하마비'랍니다. 태종은 건물을 짓고, 담을 두르고, 마지막으로 하마비를 세워 종묘의 격식을 한 단계 높입니다. '대소 관리로서 이 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라는 푯말을 세웁니다. 그 푯말이 현종 때 이렇게 돌비석으로 대체했습니다.

이렇게 신성한 곳이건만 요즈음엔 대낮부터 고성방가에 술판, 고스톱판까지 벌어져 씁쓸함을 자아내게 합니다. 더구나 종묘 앞이 단골 집회현장이라서 시위가 있는 날이면 확성기 소음에 고요함이 무너집니다. 시위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곳만은 피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신향로
ⓒ 이종원

신향로

종묘 정문에서부터 거칠고 널찍한 박석길이 한없이 이어집니다. 이 곳을 거닐다보면 내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가운데 길이 좌우의 길보다 조금 높답니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이 지나 다니는 신향로(神香路)이고,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이며, 왼쪽이 세자로(世子路)랍니다.

그러나 길은 얼마 가지 않아 헤어져야 합니다. 신향로는 정전 정문으로, 어로와 세자로는 왕이 하루 전에 묵을 어숙실 일곽에 닿습니다.

연못

신향로 우측에는 네모난 연못에 둥그런 섬이 있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고대 우주관인 '天圓地方'을 상징하겠지요. 그런데 섬에 심어진 나무는 소나무가 아니라 향나무여서 이곳이 제례공간임을 보여줍니다. 이 연못에는 연꽃이나 물고기가 살지 못하게 했답니다. 종묘는 신성한 곳이지 보고 즐기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망묘루와 향대청

연못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가면 '망묘루'가 나온답니다. '임금님 묘를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이 생각나는 곳'이란 뜻입니다. 종묘 경내에 있는 건물 지붕모양이 엄숙하고 단아한 '맛배지붕'을 하고 있지만 이곳만은 유일하게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요.

그 옆엔 향대청 건물이 길게 늘어섰습니다.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는 곳이랍니다. 제사 때는 거의 200여명의 인원이 따른다고 합니다.

▲ 공민왕신당
ⓒ 이종원

공민왕신당

망묘루 옆 구석에 보면 공민왕신당이 나옵니다. 이곳엔 고국공주와 공민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지요. 조선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려왕의 신당이 있어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아마 태조 이성계는 공민왕을 존경했을 겁니다. 공민왕을 통해 이성계 같은 신진사대부들이 벼슬에 오를 수 있었지요. 원나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치적을 높이 평가했을 겁니다.

공민왕은 의복, 변발을 금지 시키는등 자주적인 정치를 폈던 것이 태조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비록 망한 나라의 임금이지만 그의 공적만은 인정했기에 신당을 세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 어숙실
ⓒ 이종원

어숙실

어숙실은 왕이 목욕하고 재계하며 의복을 정제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입니다. 왕은 제사 하루 전에 이곳에 와서 준비를 하지요. 가운데 건물이 '어제실'이며 왕이 머물고. 오른쪽 건물 세자가 머물었던 곳입니다. 왼쪽 건물은 '어목욕청'이며 제사 전 목욕하는 곳입니다.

8일 전부터 예조에서 날짜를 잡고 준비를 한답니다. 그때는 음주가무를 금하고 문상도 가지 않고 사형도 집행하거나 선고를 하지 않으며 심지어 부부가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그 정성이 대단하지요.

정면에 보이는 어재실에는 얼마 전까지 문이 없었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문짝을 뜯어내고 상품을 팔고 전시를 했다고 합니다. 임금이 머문 곳을 철저하게 유린했던 것입니다. 금년에 다시 복원해서 문짝을 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 전사청
ⓒ 이종원

전사청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ㅁ자형 건물이지요. 전사청 앞에는 돌이 움푹 솟은 곳이 보이지요.

큰 곳은 이 '찬막단'입니다. 이곳에 천막을 치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곳이지요. 작은 돌판은 '희생대'라고 합니다. 제례 때 바칠 소, 양, 돼지를 검사하는 곳이지요. 소, 양, 돼지를 잡아 생고기를 바치는데 최상의 동물을 잡았겠지요. 만약 좋은 소를 잡지 않으면 귀양까지 보낼 정도로 엄격하답니다. 제례 때는 성칠제(腥七體)라 하여 소, 양, 돼지의 날고기의 일곱 부위를 각각 한 근씩 올렸습니다. 희생물을 잡을 때 '난도'라는 방울이 달린 큰칼을 사용하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난도질'이란 말이 나왔나봅니다.

▲ 정전
ⓒ 이종원

정전 (국보 227호)

정전은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신 유교 사당입니다. 건평만 1270제곱미터로 동시대 단일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동서가 109미터나 되어 100미터 트랙보다 훨씬 길답니다. 이는 신위수가 늘어날수록 건물을 옆으로 증축한 결과지요. 만약 조선의 역사가 더 길어졌으면 길이가 더 늘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담장 안에는 나무 한 그루도 없습니다. 일체의 화려함과 장식을 배제하고 꼭 필요한 구성요소만 있어 단정한 유교의 기품을 반영하고 있답니다.

가장 오른쪽이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태종, 세종, 세조 등이 이어집니다. 남북으로 신로가 월대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유난히 경사가 심한 지붕은 하늘로 향한 무한함을 상징합니다. 박석은 바깥으로 살짝 경사를 두어 물이 고이는 일이 없다.

▲ 기둥
ⓒ 이종원

반복과 대칭을 기본으로 하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무한하게 반복되는 기둥 배열은 끊임없는 왕위의 영속성을 상징합니다. 일체의 장식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붉은 기둥과 천장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제 딸에게 이것을 보여 주었더니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미술시간에 배울 원근감을 몸으로 체험했을 겁니다. 달려가고픈 충동을 느끼는 곳이 이곳이지요.

▲ 전대와 후대의 건축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 이종원

신위가 늘어날수록 건물이 늘어납니다. 그러다보니 전대와 후대의 건축의 특징이 함께 어우려져 있답니다. 계단이 이동했던 흔적도 있습니다. 전대에는 배가 볼록한 '배흘림기둥'을 사용했지만 후대는 사진처럼 밑으로 넓어지는 '민흘림기둥'을 사용하고 있답니다. 시대가 함께 공존하는 아름다움이 정전을 바라보는 맛이지요.

문을 자세히 보세요. 조금 뒤틀려 있지 않나요? 꽉 닫히지 않게 한 것은 혼백들이 드나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외에도 문을 닫으면 밀폐된 공간이 되어 나무가 부식될 겁니다. 이렇게 살짝 틈을 내면 통풍이 되겠지요.

▲ 공신당
ⓒ 이종원

공신당

정전 앞 좌측에는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공신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왕이 늘어날수록 공신들도 늘어나겠지요. 창건 때는 3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 왕의 신실과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며 죽어서도 왕과 함께 있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공신당에는 조선 태조의 공신을 비롯하여 27대 순종까지 정전에 모신 역대왕의 공신의 신주 83위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 영녕전
ⓒ 이종원

영녕전 (보물 821호)

영녕전은 세종 3년(1421) 정전에 모시던 태조의 4대조 목왕, 익왕, 탁왕, 환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태실 4칸, 동·서익랑 협실 각 한 칸의 별묘로 처음 지어졌습니다.

세종 때 정종이 승하하여, 정전 감실에 신위를 모실 공간이 모자라자 중국 송나라때 따로 별묘(別廟)를 세웠던 예를 채택하여 짓게 된 것이지요. 영녕전은 건물과 묘정의 규모에서도 정전보다 작게 하여 두 건물 상호간의 위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더욱 특이한 것은 가운데 태조의 4대조를 모신 네 칸을 그 좌우의 협실 여섯 칸보다 높게 하여 위계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뿌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좌우 협실에는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셨답니다.

재위기간이 비교적 짧은 임금이 모셔졌답니다. 처음엔 정전에 모셔졌다가 나중에 이곳으로 옮겨집니다.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기 때문에 임금이 영녕전으로 옮겨지며 공신전의 신위는 가족품으로 돌아가겠지요.

악공청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한 악공들이 준비하며 기다리던 곳이지요. 악공청은 정전과 영녕전 밖에 서쪽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답니다. 이들 악공청들은 현재 남아 있는 것만으로 정확한 내부 구조를 알기 힘들지요.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의 경우 지금은 개수하여 정면 6간 측면 2간을 이루는 기둥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종묘제례는 공간, 의례절차, 음악, 무용, 악기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지요. 거의 500년 이상 그대로 보존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우리 문화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울창한 숲길을 걸었습니다.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합니다. 절제 속에 장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정전은 선왕에 대한 마음을 건축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바라만 봐도 조상에 대한 예와 정성을 느낄 수 있답니다.

한적한 오후에 가족과 함께 종묘를 거닐어 보십시오. 세파에 찌든 마음을 정화시켜 왠지 모를 후련함이 가슴을 파고 들겁니다.

종묘 메모

1) 입장료

청소년(19세-24세) 500원/ 어른 1천원
무료입장. 18세이하, 65세 이상

2) 관람시간

3월-10월: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토일 공휴일9오전 9시-오후 7시)
11월-2월: 오전 9시-오후 5시 30분
휴관일 :매주 화요일

3) 교통

지하철 1호선/3호선/5호선 종로 3가역 하차 /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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