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 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 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으로 금빛을 만들어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게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안도현의 詩. 구월이 오면)
백로(白露)를 앞두고, 들판이 온통 들꽃 천지입니다. 예전에 이현주 목사님이 쓰신 “어느 이름 없는 들꽃으로” 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름 없는 들꽃이 어디 있냐?’고 했습니다. 들꽃이 이름이 있건 없건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롯하게 피어있는 들국화 한 송이는 아무런 욕심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길손을 향하여 다정한 눈빛을 보냅니다. 자태가 화려하지 않지만 들국화의 그윽한 빛깔은 따사로운 9월의 햇살만큼 눈부십니다. 가을바람에 들국화가 살랑살랑 흔들거립니다. 그 흔들거림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대하여 ‘그게 아니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살지만, 이 살풍경한 시대에 보잘 것 없는 들꽃 한 송이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정지된 듯한 고요와 평화의 메신저가 되고 있습니다.
주인 없어 좋아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되어라
이름 없어 좋아라
송이송이 피지 않고 무더기로 피어나
넓은 들녘에 지천으로 꽂히니
우리들 이름은 마냥 들꽃이로다
뉘 꽃을 나약하다 하였나
꺾어보아라 하나를 꺾으면 둘
둘을 꺾으면 셋
셋을 꺾으면 들판이 일어나니
코끝 간지르는 향기는 없어도
가슴을 파헤치는 광기는 있다
들이 좋아 들에 사노니 내 버려 두어라
꽃이라 아니 불린 듯 어떠랴
주인이 없어 좋아라
주인이 없어 좋아라
(구광렬의 詩, 들꽃)
들꽃이 현대인에게 주는 삶의 화두는 ‘자유’입니다. 민중을 상징하는 ‘들풀’(民草)은 밟혀도 밟혀도 일어납니다. 그 기세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민중 민초들이 힘입니다. 우리 민족은 4.19, 5.18, 6.10항쟁을 통하여 들풀같이 거세게 일어나는 민중들의 힘을 보았습니다.
둘을 꺾으면 셋 / 셋을 꺾으면 셋을 꺾으면 들판이 일어나니
들꽃은 자유와 대비되는 무욕(無慾)과 저항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긴 장마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들꽃 무더기에 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이 모처럼의 평화는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의 희생의 결과였습니다. 들꽃과 들풀은 자유를 사모하며 영원의 순간을 살고자 하는 모든 민중들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들이 좋아 들에 사노니 / 내버려두어라 / 꽃이라 아니 불린 듯 어떠랴 /주인이 없어 좋아라 / 주인이 없어 좋아라
이 시대는 진정한 노래가 없습니다. 노래와 춤을 잊어버렸습니다. 나는 들풀, 들꽃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노래와 춤을 봅니다. 저녁 햇살을 받으며 들꽃, 들풀들이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저녁나절 산보를 다녀와서 잠시 책상머리에 걸터앉았습니다. 망연한 생각이 듭니다. 감상도 괜한 듯하여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녁 해가 막 지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들꽃을 보고 느낀 감동이 더 크게 전달되는 듯 합니다. 간단한 뉘우침이 생깁니다.
“나도 들꽃처럼 자유한 영혼으로 살고 싶습니다.”
일순간,
지나가는 한쪽의 영감을 잡기 위하여
차라리 내 연약한 육신은
산산조각이 나도 좋으리
내 가슴이 깨어지는 것도
막아내지 않고
존재라는 영명한 억겁으로부터
나는 자유하리
한 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이 나약한 한계로부터
조금도 유보함이 없이
껍데기를 벗고서
자유인이라는 이름 석 자를 빌어
비로소 서야지
내 발로 서야지.
(박철의 詩. 어느 자유인의 고백)
새벽, 미명(未明)이 채 가시지 않은 들판을 달립니다. 내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들풀이고 들꽃입니다. 나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들꽃과 들풀에서 이 민족, 민중들의 생명력을 봅니다. 이 민족의 분단과 분열 앞에서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획득하려는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횡포를 기억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가난과 억업과 모순과 역경, 절망의 늪, 병고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의 몸부림과 고뇌를 기억합니다. 이 땅에서 상처 받은 이들이여, 그대들 안에서 생성된 자유와 통일의 꽃이 이른 새벽, 들꽃처럼 오롯하게 피어나기를….
제발, 이 속 좁은 가슴에 살기 띤
냉소가 머물지 않았으면
제발 이 나약한 육신에 섬뜩한
독버섯이 자라지 않았으면
제발 이 허망한 세월에
수습할 수 없는 속물 근성이
발동하지 않았으면
제발, 이 싱거운 느낌이라도 지키면서
어디에도 빌붙지 않는 자유혼으로 남아서
한 줌의 흙이라도 거름이라도 되었으면.
(박철의 詩.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