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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봄 소풍을 가서
중학교 2학년 때. 봄 소풍을 가서 ⓒ 느릿느릿 박철
그런데 '울퉁불퉁' 선생님께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 정도로 무서웠다. 진짜 해병대 출신인지는 모르지만, 수업 시간에 해병대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또 애들이 "재밌는 얘기 해주세" 하고 조르면 대학 시절 연애하던 이야기, 생맥주 마시기 대회에 나가서 일등 했다는 이야기들을 실감나게 해주시곤 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레퍼토리가 다양했다.

선생님께서 기분이 좋으시면 교실 분위기도 부드럽고 좋았다. 말씀을 맛깔스럽게 잘 하셔서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면 아이들이 마술에 걸리듯 선생님 얘기에 빨려 들어 갔다. 그러다 선생님 기분이 안 좋으면 단체 기합을 받는데,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숙제를 안 해오면 한 번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단편 소설을 하나 지어 오라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며칠 동안 머리를 쥐어짜서 원고지 10매를 간신히 채웠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대강 풀어서 썼는데, 수필도 아니고 동화도 아니고 어정쩡한 글을 써서 제출했다. 숙제는 반장을 통해서 제출했고, 드디어 국어 시간이 돌아왔다.

교실 안은 살얼음판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울퉁불퉁' 선생님은 아이들이 일일이 호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했다. 그 다음, 개인에게만 점수를 보여주고는 숙제를 안 해왔거나 엉터리로 해 온 녀석들은 '엎드려 뻗혀'를 시키고 각목으로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는 것이었다. 일명 '빳다'이다. 빳다 회수를 세어보면 단편 소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교실 안은 완전 공포 분위기였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녀석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고, 숙제를 무난히 통과한 녀석들은 조금 미안하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고, 빳다를 맞은 녀석들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내 번호는 29번이었다. 우리반 학생수가 60명쯤 되었는데 내 키가 158센티로 우리반에서 29번째로 작았다. 그때 사진을 보면 꼭 깎아 놓은 밤톨 같다. 내가 교탁 앞에 나가섰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시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철, 너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
"솔직히 말해. 너 어디서 베낀 거지?"
"아, 아닙니다."

'울퉁불퉁' 선생님은 내 말을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쓴 것임을 거듭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일단 자리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숙제 검사가 다 끝난 다음, 선생님은 다시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그리곤 말씀하셨다.

"박철, 네가 해 온 숙제 분명 네가 써 온 것 맞지? 그럼 네가 큰 목소리로 읽어봐. 네가 읽는 걸 들어보면 진짜로 네가 해 온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베껴갖고 와서 거짓말하는 것인지 다 알 수 있어. 어서 뜸들이지 말고 읽어봐."

나는 좀 떨렸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선생님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지금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떨려서 중간중간 숨을 쉬어가며 원고를 읽었다. 공포분위기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교실 안도 조용했다. 원고지 열장을 다 읽었다. 그리고 가만히 선생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1분여 지났을까?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시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셨다.

"철아, 잘 들었다. 네 어린시절 얘기였구나!"

이렇게 말씀하면서 활짝 웃으시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다 놀란 표정들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울퉁불퉁' 선생님께 인정받아 국어 과목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다른 과목은 점수가 신통치 않았어도 국어 점수는 늘 최상이었다. 그때 '울퉁불퉁' 선생님 눈에 들고부터 나는 작문에 관한한 교무실에 늘 불려 다니는 몸이 되었다. 목소리가 안 좋아서 웅변 대회는 나가지 못했지만, 웅변 원고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친구들 연애 편지도 대신 써주었다. 그 시절에는 빡빡머리 촌놈들이 뭘 안다고 여학생들과 비릿한 연애질을 했다. 나는 카알 히티의 <명상록>, 서정주, 브라우닝, 릴케 등의 싯귀를 곁들여 연애 편지를 써주었는데 인기가 좋았다. 나중에는 여학생에게 전달된 편지가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아 복사본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로부터 내 어줍잖은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주로 '성명서'를 많이 썼다. 1980년 중반 광산 노사 분규가 한창이었을 때에는 하루에 12장의 성명서를 써준 적도 있었다. 한번은 노동 운동가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결혼 주례를 하셨던 문익환 목사님이 주례를 마치고 내게 오시더니 내 손을 붙잡고는

"오늘 박전도사 시에 감동 먹었어. 오늘 자네 시가 주례사보다 더 빛났어. 자네 시가 신랑신부 두 사람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 주리라 믿네."

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하신 일도 있었다.

1976년 화천재건중학교 교사 시절.
1976년 화천재건중학교 교사 시절. ⓒ 느릿느릿 박철
나는 아무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글쓰기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셈이다. 또 명색이 시인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직 이름을 떨칠 만큼 훌륭한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을 보면 '울퉁불퉁' 선생님이 아무래도 내 작문 실력을 잘못 판단하신 것 같다. 어찌 되었거나 내겐 고마운 선생님이시다. 지금부터 30년도 더 전에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며 해주셨던 말씀을 내가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도 기억하고 있다.

"철아, 잘 들었다. 네 어린 시절의 얘기였구나."
그것으로 이미 내 어줍잖은 글쓰기에 대한 칭찬은 이미 다 받은 것이다. 그 한마디가 내 글쓰기의 인연의 줄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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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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