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은 우리 어머니의 72번 째 생신이다. 어머니의 마음은 늘 자식생각 뿐이다. 나의 어머니는 4남매를 두셨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둘이고 위로 누나가 하나 있다. 살다보니 다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다. 어머니는 무소식을 희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자식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늘 꼼꼼히 확인하셔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지금 어떤 기분인지 다 알 수 있다. 환한 얼굴을 하고 계시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어머니는 기분 좋은 날이면 말씀이 많으시다.
옛날 기억을 얼마나 잘 하고 계시는지. 한 번 이야기자락을 붙잡으시면 실타래처럼 한 없이 이야기가 나온다. 거의 다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머니는 처음 하는 것처럼 또 하신다.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 속에는 무궁무진한 삶의 애환과 추억이 담겨져 있다. 작은 오두막집에 사시면서 바깥출입을 못하시니 적적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화를 많이 하신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분전환을 하시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요즘 어머니의 얼굴이 어두울 적이 많으시다. 대구에 사는 동생이 섬유 무역업을 했는데 IMF 파동으로 된서리를 맞아 거의 파산 직전 상태에 있다. 어머니의 생각은 온통 대구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에게 고정되어 있다. 걱정을 해 보아야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지난 추석 때에도 대구에 사는 동생은 오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형이라고 동생을 도울 길이 없어 답답하고 미안하다.
어제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 오늘 아침 돌아오는 길에 생일 케이크를 샀다. 빵집 아가씨가 ‘생일 맞는 분이 몇 살이에요?’ 하고 묻는다.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72세요’그렇게 대답하고 케이크를 받아들었다. ‘72이라는 세월의 길이에 대하여, 나는 과연 몇 년을 어머니와 함께 했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교동 가는 뱃길
물이 빠지자 갯벌 섬이 들어났다
갈매기 몇 마리가
갯벌 위에 앉아 졸고 있다
안개를 헤치며 배가 진행한다
산이 안개구름에 가려
끝만 살짝 보인다
나는 어머니 생각을 하며
뱃머리에 팔짱을 끼고 서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저녁에 어머니 집에 모였다. 아이들이 할머니께 선물 한 가지씩을 다 내놓는다. 어머니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신다. 아내가 어머니께 소감이 어떠시냐고 여쭙는다. 그러자 어머니는 한참 가만 계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길 바란다. 박 목사가 진실한 주의 종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이 에미 소원이요, 기도 제목이다. 내 생일을 기억해 주어서 참 고맙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른다. 어머니 연세가 일흔 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렸다. 남은 세월을 활짝 웃으며 사셨으면 좋겠다. 적어도 나같이 못난 아들 때문에 어머니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생각뿐이다.
| | 어머니와 오두막집 이야기 | | | |
| | ▲ 어머니와 세 며느리 | | 우리 어머니 연세는 올해 예순 여섯입니다. 지금 우리 어머니 직업은 미싱사입니다. 의류보세 공장에서 일하고 있지요. 연세가 많아도 워낙 꼼꼼하고 성실하셔서 공장에서 인정을 받아 지금껏 버티고 계십니다. 최근 어머니의 건강이 많이 나빠 지셨습니다. 늘 앉아서 하는 일이라, 무릎관절이 안 좋으시고, 또 먼지를 많이 마셔서 호흡기도 안 좋은 편입니다. 어머니도 이제는 더 이상 일하실 수 없게 되어 이달 20일께 그만두기로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인생은 재봉틀과 함께 살아온 재봉질 인생입니다. 인생의 험한 굴곡을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재봉질 하듯 살아오셨습니다. 나의 유년 시절, 어머니는 손틀 미싱을 돌려 그 시절 우리 식구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도록 생계를 도맡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방만한 삶으로 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적인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영문도 모르시고 어디 아프냐고 하시면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요.”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그간 우리 가정도 많은 시련의 언덕을 넘었습니다. 웬만큼 살만하게 되자 아버지는 “예수 잘 믿으라”는 말씀을 남기고 지금부터 15년 전, 세상을 떠나셨고 우리 어머니는 여기저기 보세공장을 전전하셨습니다. 3남 1녀의 자식들이 다 장성하여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재봉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자식에게도 신세(?)지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머니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원하셨습니다.
흐릿한 공장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돋보기를 쓰시고 재봉 바늘에 실을 꿰고 계실 어머니 모습이 그려집니다. 어머니는 이제 늙어서 눈이 침침해 돋보기를 쓰시고도 바늘에 실 꿰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이 못난 아들은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이제 나도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지요. 아내가 시집오기 전 직장 생활 할 때 모아 둔 돈 전부를 어머니 집을 사고 집을 고치는 수리비와 교육관 건축헌금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아내도 돈에 대해 눈꼽만한 미련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 주었습니다. 10평 남짓한 작은 토담집을 싼 값에 구입하고, 어머니가 살기에 적당한 구조로 집을 고치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오자마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다 사랑이지요. 어머니 집을 사서 고쳐 새 집을 만든 기쁨도 크지만, 성도들의 사랑이 더 귀하고 소증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우리 어머니는 큰 아들과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창(窓)을 크게 달았습니다. 온 방이 환하게. 구석구석 어머니의 그늘진 마음에 따스한 햇살이 비춰지길 바라며.
“…따스한 햇살, 어디 어머니 마음에 비하랴….” (1997년 6월) / 박철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