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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오전 내내 방 안에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바람을 쏘이러 나갔다. 맑은 날씨이지만 바람은 차다. 그냥 걷기로 했다. 철지난 갈대숲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스레이트 지붕을 한 집들이 추워서 그런지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사람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다. 적막하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길’이라는 삶의 화두에 천착(穿鑿)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길을 걷는 것에 자주 비유한다. 편안한 길, 넓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좁은 길, 험한 길을 애써 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산에 갈 때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고 가파르던 오솔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 어리둥절한 적이 있었다. 오솔길이 넓은 길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길 바랐고, 걸어서 올라가기보다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이 빠르고 편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넓고 평평한 길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길 위에(途上) 놓여 있는 것이다. 그 길 끝에는 항상 여러 개의 갈림길이 놓여 있고 시간에 떠밀려 우리는 좋든 싫든 하나의 길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길을 갈 수는 없다.
간디 이후 인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영적인 인물로 알려진 비노바 바베(Vinoba Vhave)가 그의 노년에 깨달은 삶의 화두는 ‘버리고 행복하라’였다. 일상생활에서 쓸모 있는 기술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새로운 것을 배울 의지도 역량도 없이 손으로 하는 일에 무관심한 현대인들의 게으름과 오만은 삶에서 분리된 시체나 다름없다고 했다.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산다. 살인강도도 세상 탓이지 제가 못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적어도 무엇이 수치인가를 아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을 얻어먹는 자는 분명 사람이 못할 짓을 범한 탓으로 그런 욕을 먹는다. 참새는 참새의 길이 있고 돼지는 돼지의 길이 있다. 하물며 인간일 소냐.
저물어가는 한해를 앞두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자기존재의 지점을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고, 돌이켜야 할 것은 돌이켜서, 더 이상 한눈팔지 말고 내가 가야할 길을 똑바로 가야 하겠다.
길을 가다 서있는 나무에게 묻는다
길의 상처를 달래주는 몇 그루 나무
나무에게 묻는다
성처가 달고 달기 전에 쓰고
쓰기 전에 매웁다고
모든 그리움은 쉽게 그러나 더욱 아쉽게
끝나고 마는 세월 속의 이야기라고
길을 가다 서있는 나무에게 묻는다
내 상처 내 마음의 흔적을
아직 빛나는 어느 날의 기억을
지울 수 없어 세월에게 묻는다
길은 길며 내 일은 멀고
오늘은 짧으며
나를, 세월은 기다리지 않는다고
(정공량 詩. 길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