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겨울이 점점 깊어져 갑니다. 낮의 길이는 짧고 대신 밤이 깁니다. 모처럼 시골에서도 한가로운 삶의 여유가 찾아왔습니다. 밤늦게까지 TV를 보아도 괜찮고, 아침에 조금 늦잠을 잤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김장도 잘 익었겠다 저녁밥을 일찍 해먹고 동네 아낙들은 이웃집으로 마실을 갑니다. 마실도 일종의 품앗이 같습니다. 이야기거리도 다양하지요.
처음에는 남편 이야기, 애들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한참 떠들다보면 뱃속이 출출하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먹는 이야기가 줄줄이 엮어집니다. 처녀 적 선보려고 다방에 갔다가 처음 먹어 본 커피 이야기, 시집 와서 동짓날 시어머니가 팥죽을 쑤었는데 자기한테는 먹어보란 말 한마디 없이 식구들이 몽땅 먹어버려 약이 오른 이야기, 애 갖고 숭어회가 먹고 싶어서 남편한테 회 타령을 한 이야기, 시어머니 몰래 한밤중 부엌에 들어가 밥 비며먹다 걸린 이야기 등 순전히 먹는 이야기뿐입니다.
먹는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먹을 게 나올 차례입니다. 그러면 찐 고구마도 나오고, 과자 부스러기도 나오고, 어떤 때는 비빔국수도 나옵니다. 살이 쪄서 고민인데 하면서도 다 먹습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입가심으로 밭에 묻어둔 무나 순무를 캐다가 깎아 먹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찬 무를 깎아 먹는 맛은 안 먹어본 사람은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 나의 유년 시절, 흐릿하지만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강원도 화천 논미리, 이웃 친척집 사랑방에 더벅머리 총각들이 가득 모여 한 쪽에서는 새끼를 꼬고 한 쪽에서는 윷놀이나 화투를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형들이 주고 받는 걸쭉한 농 짓거리에 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겨울밤은 깊어가고, 그 시절 내 고민은 "심심하다"였습니다. 낮에는 그럭저럭 썰매를 타든지, 연을 날리든지 해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데 밤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 무료함을 때우기 위해서 내가 찾아간 곳은 우리와 먼 친척뻘 되는 집이었습니다. 어린 내가 찾아가도 한번도 괄시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위인 형이 셋이 있었는데 그 중에 맏형은 손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겨울철, 참새를 잘 잡았습니다. 소나무 가지를 소코뚜레처럼 휘어 덫을 만들어 논두렁 양지 바른 곳에 설치해 두고, 거기에 조 이삭을 뿌려두면 참새들이 모이를 쪼아 먹으러 왔다가 덫에 걸려듭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참새를 열 대여섯 마리를 잡았습니다. 축 늘어진 참새 털을 뽑고 소금을 뿌려 화롯불에 구워먹습니다. 사랑방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게도 바싹 구워진 참새를 한 마리를 주면 감지덕지하고 먹었습니다.
형들은 화투를 하거나 윷놀이를 하면 꼭 내기를 했습니다. 내기에서 진 사람들이 남의 밭에 묻어둔 무를 서리해 갖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는 참을 만했지만 장가도 안 간 형들이 신문지에 돌돌 말은 담배를 쉴 사이 없이 피어대는데 추우니 문도 열어놓을 수 없고 보통 고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양말도 흔치 않아 어떻게 구했는지 군용 양말을 신었는데 거의 다 기운 양말이었습니다. 겨우내 발을 씻지 않아 발 고린내가 진동을 해도 적당하게 그 냄새에 길들여져 친숙할 정도였습니다.
내기에서 이긴 형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내기에서 진 형들은 패잔병 같이 기가 죽어 밖으로 나갑니다. 어떤 때는 나를 불러서 망이나 보라고 하면서 무서리를 하는 데 끼워 주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남의 집 무 구덩이를 찾아 갑니다. 미리 봐 두어서 형들은 무 구덩이를 잘 찾아냅니다. 두어 명은 망을 보고 두어 명이 작업을 합니다. 무 구덩이에 눈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손으로 눈을 쓸고는 무 구덩이 아귀를 찾습니다. 무구덩이 아귀는 짚으로 틀어막아 놓았는데 그걸 찾아야 무를 꺼낼 수 있습니다.
망을 보던 형이 작지만 날카롭게 한마디 합니다.
"야, 이 새끼야, 뭘 그리 꾸물거려? 빨리 구멍을 찾아 봐."
"야, 새끼야, 깜깜해서 잘 보이냐? 그럼 내가 망 볼테니 니 놈이 꺼내볼래?"
처음부터 끝까지 욕입니다. 그래도 크게 다투지는 않습니다. 드디어 아귀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면 땅바닥에 엎드려 허리를 굽히고 앉은뱅이 스케이트 꼬챙이로 무를 찔러 꺼냅니다. 주인한테 들킬까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칼바람이 쇳소리를 내며 지나갑니다. 분명 개소리는 아닌 듯한데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나직이 들립니다. "야 귀신인가 보다. 튀자." 누구라고 할 것이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뺍니다. 귀신이라는 소리가 더 무서웠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집에 당도하면 형들은 낄낄거리면 웃습니다. 그리고는 방금 무서리를 해 온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습니다. 낫으로 무 껍질을 벗겨서 반으로 잘라 나눠 먹습니다. 사랑방에는 호롱불이 가물거리고 형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모릅니다.
깊어가는 겨울밤, 옛 이야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이웃집에 마실을 가지 못해도 집안 식구들끼리 윷놀이라도 하든지, 아니면 따뜻한 차라도 한잔 하면서 지나간 추억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무를 어떻게 심는지 아십니까? 가을에 땅 속에 묻어둔 무를 다 꺼내 먹고 씨를 할 무를 서너 개 남겨 놓습니다. 다시 봄이 돌아오면 그 무를 밭에 반듯이 심습니다. 그걸 교동에서는 '뽕 박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크게 자라고 꽃이 핍니다. 꽃이 지면 씨를 받아 두었다가 김장 배추 심을 때쯤 같이 밭에 뿌립니다. 그리고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서리 올 때 쯤 무가 얼기 전에 밭에서 뽑습니다. 순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여행스케치 2004년 2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