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의 남한측 수석 대표를 맡고 있는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가 6자회담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미국에 경도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2차 6자회담의 성사가 불투명하고, 말 그대로 "'아' 다르고 '어' 다를 정도"로 표현 하나 하나, 의제 하나 하나를 놓고 북한과 미국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양측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남한 정부가 단호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막중한 임무를 띠고 최전선에서 6자회담을 조율하고 있는 이수혁 차관보의 언행을 보면, 마치 미국 정부의 대변인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지난 1월 22-23일 양일간 미국을 방문해 한-미-일 3자협의를 마친 이 차관보가 워싱턴 특파원들과 나눈 일문일답을 보면, 이러한 평가가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23일자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차관보는 북한이 조건없이 6자회담에 나와줄 것을 촉구하면서도, 미국이 내건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을 '그대로' 따라서 말하고 있다. 그는 북한이 최근 제안한 핵동결에 대해 "동결을 받아들인 것 아니다"고 말해 북한의 제안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북한은 핵을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여기에는 북미간에는 물론이고 미중간에도 커다란 이견을 보이고 있는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북한에게는 조건없이 6자회담에 나와야 한다면서, 차기 6자회담에서는 '핵동결'이 아니라 '핵폐기'를, 그것도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 유행어처럼 등장한 '검증'까지도 포함한 회담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6자회담이 한참 진행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핵폐기와 검증 문제를 2차 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의제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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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관보, 북한 HEU 보유 단정
이수혁 차관보가 보여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실체가 확인되지도 않은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과 관련해 일방적으로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다. 그는 "핵 폐기든 동결이든 고농축 우라늄을 포함해야 한다"며, "미국은 확고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켈리(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방북했을 때 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를 분명히 북한이 확인했다"며, "그래서 북한은 핵에 대한 모든 우려 불식해야 한다. 앞으로 협상에서 그것도 다룰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차관보는 또한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판단과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서, 쟁점은 8천개 연료봉의 재처리가 아니고 북한의 핵폐기다. (한미일 3국의) 현재의 분위기는 농축우라늄이 있다는 것을 검증하자는 것이다"며 한미일 3자 협의 결과 2차 회담에서 HEU를 강력히 제기할 것이라는 점을 내비쳤다. 특히 그는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검증 책임은 북한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차관보의 발언에서는 북한의 무기급 플루토늄의 추출 여부 및 수준보다는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더 문제삼고 있는데, 이는 미국 강경파들의 인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보다는 이를 구실 삼아 북한 정권의 붕괴를 더 원하고 있는 미국의 강경파들은 이를 위해 고농축 우라늄을 '카드화'해왔다. 이라크에서 발목이 잡혀 주춤하던 미국 강경파들은 6자회담이 성사된 이후, 회담 초기부터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을 집중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또 이를 관철시키고 있다.
미국 강경파들이 이처럼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북한이 HEU를 부인할 경우 이를 근거로 6자회담의 판 자체를 깰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고, 또한 HEU의 경우 완전한 사찰과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카드로서의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내 핵전문가들조차도 부시 행정부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차관보의 발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노무현 정부가 플루토늄보다 고농축 우라늄을 더 시급한 사안으로 보고 있다면, 이는 핵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장처럼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이를 핵무기화하는데에는 '수년'이 걸린다는 것이 대다수 핵전문가의 분석이다. 반면에 8천여개의 사용후 연료봉을 재처리할 경우 '수개월' 내에 5개 안팎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다. 사안의 시급성을 볼 때, 플루토늄이 더욱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 차관보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검증 책임도 북한에게 있다고 강조한 것 역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북한이 HEU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발언인데, 북한은 잘 알려진 것처럼 HEU 보유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HEU를 갖고 있지 않다는 북한에게 HEU가 있다는 것을 검증하라는 접근법을 통해 과연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돌파구를 열 수 있을지 극히 우려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 HEU는 존재하는가?
물론 북한에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사안이다. 또한 존재한다면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HEU는 아직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사안이다. 미국은 증거를 갖고 있다지만, 아직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2002년 10월 켈리 방북 때 북한이 이를 시인했다고 하지만, 북한은 미국의 적대정책이 계속되면 "우리는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고,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수혁 차관보는 미국이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고 있다고 강조했지만,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2002년 11월 미 의회에 전달한 메모에서 "우리는 최근까지 북한이 원심분리기 시설의 건설을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원심분리기는 우라늄을 농축시키는 시설이다.
이 차관보는 또한 북한의 HEU 보유 근거의 하나로 "북한이 알루미늄관 등 주요 부품을 수입한 것 알고 있는데 수입한 적 없다고 발뺌한다"고 말했지만, 북한이 원심분리기용 고강도 알루미늄을 수입했는지도 불확실할 뿐더러, 고강도 알루미늄은 '다용도'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북한이 HEU를 보유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일례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 증거로 이라크가 수입한 알루미늄관을 제시한 바 있지만, 이는 미국 정부 전문가들의 면밀한 분석 결과 원심분리기 제조용이 아니라 포탄의 탄피용이었다는 것이 전직 미 국무부 관리의 양심선언으로 폭로된 바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루미늄관의 용도를 왜곡한 것이다.
북한의 HEU 보유 논란과 관련해 존 루이스 스탠포드대 명예교수의 주장도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최근 미국 의회 및 민간 대표단을 이끌고 영변 핵시설 등 북한 방문을 주선했던 핵비확산 전문가이다.
그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AP통신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조선어를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고 주장한 바 있다. 22일자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문제가 되고 있는 켈리-강석주 대화록의 북한측 문서에는 "우리는 핵 프로그램을 가질 권리가 있다(We are entitled to have a nuclear program)"고 나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켈리 등 미국 측 대표단은 "우리는 핵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 미국측은 북한이 HEU의 보유를 시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루이스 교수의 주장인 것이다. 이에 켈리는 강석주에게 거듭 확인을 요청했고, 강석주는 "(우리가 HEU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은 당신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볼 때, 북한이 HEU를 보유하고 있고, 이를 미국에게 시인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측면이 있다. 루이스의 주장처럼 통역상의 '불일치'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고, 북한이나 미국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는 분명 규명되어야 할 사안이지, '한미공조'를 앞세워 미국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 북핵 해결 전략 다시 세워야
이수혁 차관보도 강조한 것처럼, 고농축 우라늄 문제는 2차 6자회담의 성사 과정은 물론이고 2차 회담이 열릴 경우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북미간의 입장 차이가 워낙 큰데다가 최근 중국도 북한의 HEU 보유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미중간의 갈등 조짐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차회담이 열리더라도 HEU를 둘러싼 말싸움만 하다가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차관보를 비롯한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팀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북한의 HEU 보유를 단정하면서 미국, 일본과 함께 북한을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HEU를 둘러싼 미국과의 마찰을 해소할 의사를 내비친 것에 주목해 중국과 함께 둘 사이의 이견을 해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루이스 교수가 방북 성과를 설명한 것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HEU를 둘러싼 '미국과의 불일치(disagreement)'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북한이 미국에게 기술적인 대화를 제안했다"고 전해왔다는 점이다. 루이스 교수와 함께 방북한 잭 프리처드 전(前) 대북교섭담당 대사 역시 "북한은 미국과 마주 앉게 되면 HEU 문제를 기꺼이 논의하겠다고 말했다"며 이와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북미 충돌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가장 해결하기 까다로운 HEU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수혁 차관보는 이를 폄하해 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는 "북한은 미국에 핵위기를 조장하는 협박(blackmail)이 통할 줄 알았지만 미국은 냉정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해, 북한이 미국 대표단의 방북 허용을 일종의 협박으로 보고 있음을 내비쳤다. 과연 6자회담의 한국측 대표로서의 자격을 갖췄는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이 제안한 핵동결을 폄하하면서 벌써부터 '핵폐기'를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폐기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거쳐야 할 단계는 '동결'이다. 북한 역시 최근 들어 최종단계에서 '핵폐기'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 차관보, 한국측 6자회담 대표 자격 갖췄는지 의구심
노무현 정부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북한 핵문제의 해결 과정은 크게 '동결'과 '폐기'로 나누고, 단기적으로는 핵 프로그램의 동결을 '실행'하면서 북한의 '폐기 의사'를 확인하고, 중장기적으로 '폐기'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순서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미국을 설득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핵동결이 아니라 핵폐기를 6자회담의 목표로 삼고 있고, 북한은 상응조치에 따라 궁극적으로 "핵 완전철폐" 의사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 함께 이러한 방향으로 외교력을 집중하면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겠지만,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대결을 해결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출범한지 1년이 지나도록 노 정부는 북핵 문제의 해결 방식으로 '한미일 공조' 이외에 이렇다할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지나치게 미국에 경도된 모습으로 말이다.
최근 남북한 사이에서는 '시간은 누구 편인가'라는 부질없는 논란을 벌이고 있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미국이 끝내 진지한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핵무장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고, 이에 대해 이수혁 차관보는 "시간은 우리편"이라며 경제난과 국제적 압박에 놓여 있는 북한으로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북한편도 남한편도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의 핵무장 가능성과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고조될 것이고, 이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다음달로 출범 1주년을 맞는 노무현 대통령은 인적 구성을 포함한 북핵 외교 전략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고도의 전문성과 치밀한 전략을 요하는 북핵 외교와 관련해 노 정부는 결코 후한 점수를 받기 힘들다.
지난 1년간의 공과를 냉정하게 판단해 4.15 총선 이후, 그리고 11월 미국 대선 이전에 한반도 위기를 해소하겠다는 목표를 잡고 지금부터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