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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보면 철마산, 고개를 이리 돌리면 천마산, 저리 돌리면 주금산, 뒤돌아 서면 축령산, 서리산.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물골에는 그런 주봉들 사이로 흘러내린 이름 모를 산자락이 발치에 걸려 넘어질 지경이다.
그런데도 늘 곁에 있으면 그리워할 줄은 모른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이런가. 건성으로 지나치고,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날이 이어지다가 산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에 이르러 게으른 몸을 앞세워 산을 오른다.
주인을 닮아 어쩔 수 없이 게을러진 강아지들을 앞세우고, 광대울 산모롱이에서 오름을 시작한다. 국수나무 덤불이며, 쪽동백나무 가지가 빼곡하여 낭창거리는 가지와 덤불이 휘어졌다가는 호되게 언 뺨을 후려갈기니 눈물이 찔끔 흐른다.
지난 봄에 후드러진 분홍으로 물들던 진달래들이 군락을 지은 언덕을 올라서는데 그늘진 곳마다 낙엽 위로 얹힌 눈들이 미끄럽다. 볕 바른 산등성이, 따스한 덤불들이 드러나고 내가 토끼라도 한잠 곤히 잠들고 싶은 손바닥만한 겨울 볕 다사로운 곳에,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외동딸 머리 빗기듯 나뭇가지를 엮어 어살처럼 울을 공들여 엮어 놓았다.
발목 높이로 내리막길마다 사립문 울 치듯이 억새나 나뭇가지로 돌려 막아놓고는 겨우 몸 하나 빠져나갈 문을 열어 놓았는데, 그 문이 바로 황천으로 가는 문이로다. 물푸레 질긴 나뭇가지에 오지게 질긴 철사를 동여매어 올무를 놓았으니 그 교묘하고 집요한 정성이 참으로 밉기만 하다.
행여나 옆으로 샐까봐 칡덩굴로 울타리를 엮어 놓기까지 한 술수가 더욱 미워 애써 엮은 울들을 모두 팽개치고, 올무를 풀어 젖힌 뒤 거기 달린 칡덩굴을 사람 머리 위로 올가미 모양으로 만들어 올려 두었다.
행여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큰 짐승이 치고 지나갔다고 통탄해하며 더 큰 올무를 놓을까 저어하여 사람 기척을 남긴 표식이다.
강아지들은 수북히 쌓인 낙엽에 한두 번 미끄러지더니 나중에는 아이들처럼 미끄럼질 장난을 거듭한다. 산등을 타고 넘다보니, 못 보던 길이 휭하니 뚫려 있다. 차가 오를 만큼 널찍한 길이 산 허리를 지르고 지나간다. 임도 같기도 한 길로 내려서서 오르니, 결국은 어느 가문의 묘석들이 서 있는 무덤으로 이어진다. 한 집안의 유해를 묻기 위해 잘라낸 산 허리치고는 참으로 대담하고 허망한 짓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전원주택 단지가 나온다. 사람의 기척은 뵈지 않고, 개들만 짖는데 데리고 간 개들도 텃세를 아는지 뒤로만 물러서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숲 속의 향기'라는 표지를 단 펜션도 들어 서 있었다. 겨울이면 어찌 오르내릴까 멀리서 걱정만 하였는데 산자락에 매어달린 전원주택들은 의외로 볕이 바르고 길도 뽀송뽀송하기만 하다.
골짜기마다 날이 푹한 탓인지 물 흐르는 소리로 벌써 봄이 온 기분인데, 물가마다 여기저기 펼쳐 놓은 집터들이 골 깊이 파고 들었다. 광대울로 오르는 길을 찾지 못해 손등을 덤불에 긁히며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은 물길을 따라 올랐다.
겨울이면 수달이 내려와 미꾸라지를 잡아 먹는다는 물웅덩이 뒤로 산들이 휭하다. 길을 내려는지, 집을 지으려는지 빼곡하던 나무들은 말끔히 베어지고, 산은 출가승처럼 맨머리를 드러냈다. 그래도 물을 먹으러 내려 왔는지 한 줌 남은 갈대섶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언가 분주히 몸을 숨긴다.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광대울 길에 여기저기 꽂힌 붉은 깃대들이 상처처럼 마음에 선명하다. 또 저 붉은 표식들은 무엇을 파헤치고, 무엇을 들여 놓으려는 걸까.
길, 집, 그리고 사람. 또 그것들을 위해 길을 내어 주고, 집을 잃고 밀려나야 할 또 다른 산의 생명들을 생각해 본다.
지난 해 송아지만한 멧돼지 세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던 광대울 산길을 내려오며 거기서 보았던 끔찍한 이빨을 지닌 덫이 생각났다. 건너 마을 사람이 이 부근에서 멧돼지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듣게 되었다. 포수 허가증을 지니었다는 그이가 한 마리를 쏘아 맞혔는데 어디선가 또다른 한 마리가 달려들어 몸을 조금 다쳤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며칠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양수기로 물을 퍼내던 집 위의 웅덩이에 가 본다. 이웃 마을에 산다는 사람이 석유통에 양수기를 실은 트럭 두 대를 몰고 와 얼어 붙은 웅덩이를 깨고, 온종일 그 안의 물을 퍼냈다는 웅덩이는 바닥까지 내려 앉아 있었다.
그 안의 고기들은 붙잡혀 가서, 매운탕 거리가 되었거나 운 좋게 몸을 숨긴 것들도 추운 겨울을 물 없는 얼음장 밑에서 모질게 보내야 할 처지다. 이제 봄이 되어 그 손바닥만한 웅덩이를 찾을 원앙이며, 오리들도 부질없이 헛걸음을 치게 될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삶을 죽이는 것은 차라리 고급스런 도덕에 가깝다. 편리함을 위해, 한 겨울의 파적이나 별미를 위해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하니 겨울산이 더욱 스산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이형덕(이시백)기자는 남양주 물골에 살며 겪은 이야기들을 모아 '시골은 즐겁다'(도서출판 향연)로 묶어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