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도 교수의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 은 디지털 매체의 개념과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방법을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기호학, 인식론, 고고학’ 이란 부제를 달고,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문자 문화에서 디지털 문화로의 변화 과정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의 변화 과정을 가장 깊이 연구한 학자는 '월터 옹' 이다. 월터 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저자의 ‘디지털 글쓰기’ 부분에만 한정하여 웹에서의 글쓰기 방법들을 살펴볼 것이다.
새로운 글쓰기 방법
(…) 필자는 디지털 언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지니는 인문학적 함의에 테두리를 치면서, 글쓰기 공간과 텍스트 개념의 변형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시킬 것이다. ( 같은 책, 17쪽 )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의 변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인쇄술이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텍스트의 복제가 가능해졌고, 원본의 내용이 크게 훼손되지 않을 만큼의 훌륭한 사본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저자가 설명한 것처럼, 인쇄술의 발명은 중세와 근대 테크놀로지를 갈라놓는 분할선이다.
(…) 쟁점은 활자 테크놀로지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냐의 여부가 아니다; 책이란 관념과 이상형은 변화할 것이다 (…) 전자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책과 쓰고 읽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볼터 ( 같은 책, 45쪽 )
실제 웹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네티즌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중 ‘페이퍼페이스’ (paper face, 종이얼굴 만들기) 가 있는데, 잡지 등에 실린 인물 사진을 소품으로 활용하여,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재미있는 포즈로 사진을 찍는 놀이이다. 이는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이 네티즌의 글쓰기 방법을 변화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해 디지털카메라 판매량은 70만대, 올 해엔 100만대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인쇄술의 발명이 활자의 대량 복제를 가능케 했다면, 이미지의 대량 복제가 시작된 것은 사진술이 발명된 19세기 초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19세기 말에 영화기술이 등장하고 이후 텔레비전이 발명되면서 영상과 이미지의 사본을 지구촌 어디에서나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만일 이런 환경이 개인적인 영역에서 모두 실현된다면 어떨까.
지금 한국의 인터넷 환경은 이 모두를 개인적인 영역에서 실현하고 있다. 영상의 생산 및 복제는 디카(디지털카메라), 폰카(휴대전화카메라), 웹캠(화상카메라) 같은 것으로 구현할 수 있고, 미니홈피나 블로그, 메신저 등을 통해 네티즌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미지를 대량 복제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됐다. 이미지를 활용한 글쓰기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글쓰기’ 라는 범주가 더 이상 재능 있는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된 네티즌 모두에게 활짝 열린 것이다. ‘1인 미디어 시대’ 라는 말은 블로그의 수식어일 뿐 아니라, ‘글 쓰는 네티즌’ 모두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드라마 <대장금> 의 인기에 힘입은 <월간궁녀>, <궁녀센스> 같은 패러디 저작물 또한 이미지가 지배하는 네티즌 글쓰기의 단면이다. 이미지가 텍스트를 보조하는 ‘참조 자료’ 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로 텍스트가 독점했던 기능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디시인사이드의 게시물에 대해 문화평론가 김동식씨는 “‘구텐베르크 갤럭시’에 ‘이미지 스피어’가 급속히 파고들면서 장난을 치고 있는 양상” 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이해하긴 어렵지만, ‘이미지로서의 글쓰기’ 가 확산되고 있다는 맥락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편집’ 의 절차를 거치는 모든 매체의 저작물이 그러하듯, 웹에도 이른바 ‘잔상 효과’가 나타난다. 앞에 어떤 이미지가 배치되었는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지에 따라 다음 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강렬한 이미지는 글 한편의 맥락을 좌우한다. 브라우저를 통해 선택적인 링크를 따라 열람하게 되는 웹 문서에서는 이런 ‘잔상 효과’ 가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새로운 글쓰기 공간과 ‘집단 지성’
하드디스크에 저장돼 있거나 저장된 디스켓을 갖고 있어도, 모니터나 프린터가 없다면 텍스트 자체를 전혀 볼 수 없다. 혹, 모니터가 있다고 해도, 저장한 디지털 문서는 원본과 같다는 보장이 없다. 디지털 자료의 특징 중 하나가 원본과 사본이, 품질 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인데, 형식(품질)의 차이가 아닌, 내용적인 측면을 본다면, 웹 문서의 경우 필연적으로 원본과 사본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 페이지 위의 단어와 스크린 위의 단어 사이의 차이는 생산물과 과정 사이의 차이, 명사와 동사 사이의 차이다. ( 같은 책, 108쪽 )
이는 웹 문서를 포함한 디지털 문서가 항상 변한다는 말이 아니고, 언제나 '변할 수'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 문자의 창안 이전에는 지혜로운 노인이 죽으면 하나의 살아 있는 도서관이 불타버린 것과 같았다. (…) (현대에 와서) 모든 종류의 데이터는 교환되고 주석된다. 사이버 공간에서 메시지와 데이터는 동적으로 흐르므로 더 이상 고정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며, 지식 공간의 형식을 결빙시키는 것도 어렵다. (…) 레비는 집단적 지성의 목표로서 쌍방적 인정과, 개인들의 풍요화를 든다. (…) 초월적 지식은 있을 수 없으며, 지식이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의 총화일 뿐이다. 집단적 지성은 종래의 자아의 지식 영역을 공동체의 지식과 집단적 사고의 형식으로 흡수, 확장시키려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함의한다. ( 같은 책, 128-129쪽 )
웹에서의 글쓰기는 더 이상 개인적인 영역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는 ‘지식 검색’ 에서부터 ‘댓글’ 까지도 집단지성의 일부분이다. 물론 ‘집단 지성’ 이 ‘글쓰기’의 영역만을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관해 깊이 연구하고 있는 KAIST 인문학부의 최혜실 교수는 ‘학생들의 리포트 중 상당수가 웹으로 수집한 문서를 짜깁기한 것인데, 이런 행위들도 연구 대상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집과 가공, 편집의 절차를 거치는 이런 행위들도, 가치판단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새로운 글쓰기 방법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다.
웹에서의 글쓰기 방법이 다른 매체와 뚜렷이 구별되는 부분은 링크이다.
(…) ‘링킹’은 활자 책에서 사용되는 주석의 전자적 등가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같은 책, 59쪽 )
(…) 요컨대 하이퍼텍스트의 주요 속성 가운데 하나인 전자적 ‘링킹(linking)’은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 바흐친의 다성성, 또는 데리다의 차연이나 들뢰즈의 ‘리좀’적 또는 유목민적 사고라는 생각들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 같은 책, 199쪽 )
이런 면에서 트랙백(원문과 관련되는 내용의 문서를 서로 엮는 방법)을 활용한 블로그의 글쓰기는 링크 개념에 아주 충실한 글쓰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웹에서의 새로운 글쓰기 방법이 출현한다면 그것은 링크의 변주이거나 텍스트를 '재정의'하는 과정 속에서 논의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참고 도서 :
김성도,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 경성대출판부.
월터 J.옹 지음/이기우 외 옮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