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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습관적으로 제일 잘못하는 말이 뭘까요.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면서 '지금은 오직 공부만 하면 된다'고 아이들의 현재의 사회적 활동을 부정하는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위 정보화 시대 아닙니까. 세상 만사에 눈코귀입 틀어막고 미래의 주인공이 되라니요. 말이 안 되지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모두 해결된다는 입 발린 말씀은 안 하시겠지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용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는 어른들이 잘 압니다. 교과서를 보면 알지요.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특히 사회 과목의 교과서를 놓고 공부한 아이들이 과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잡한 사회적 현상과 사건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을지 지극히 의문입니다. 알다시피 사회과목은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생각하는 과목이 아니라 암기하는 과목이었으니까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최근 연일 보도되고 있는 미군의 이라크인 포로 학대에 대해 전국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어떤 수업을 할 수 있을까요. 몇몇 뜻있는 선생님들은 관련 기사와 사진 자료를 준비해서 토론식 수업을 하겠지요. 만약 사회 과목 교과서에 전쟁과 폭력을 다루는 장이 들어있다면 어떨까요. 이렇게 말하겠지요.

"자, 여러분 교과서 5장 '평화, 멀지만 가야할 길'의 2절 '전쟁과 구조적 폭력'을 펴세요."

"2001년의 9·11 미국 테러 사건 이후에는 전쟁과 평화의 뚜렷한 경계가 무너지면서 전쟁과 전쟁 상태(warfare)의 광범한 공존과 혼재가 나타나고 있다. … 특히 비극적인 것은… 전쟁 사망자와 부상자의 90% 이상이 민간인들이며, 비전투원 중에서 여성과 아동들의 사망자 수가 급증 …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


전쟁과 전쟁 상태의 혼재, 딱 이라크입니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고 다치는 상황, 역시 이라크입니다. 이 교과서는 이어 "국가나 권력 집단에 의해 지속적으로 합법적인 것처럼 자행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전쟁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요. 국가, 민족, 권력, 이념, 정의, 종교, 심지어 평화와 해방의 이름으로 위장한 전쟁들. 교과서는 '함께 해보기'라는 실천 과제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네요.

"자신의 부모, 조부모와 가족, 친지들로부터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같이 직접 겪었던 전쟁의 참상들과 기억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구술 내용을 기록하여 발표해보자."


수업은 교과서 5장 1절 '우리 안의 폭력 문화'로 이어지면 좋겠군요. 개인적인 폭력의 경험과 사회적인 폭력의 문화를 알아보고, 다른 문화권에서는 역사적으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왔는지, 전쟁과 폭력 이외의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니다. 이어 평화를 파괴하는 주범은 우리 안에 내재된 차별의 감성과 논리라는 것과,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을 배격하는 관용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요.

수업은 계속해서 3장 '차별 없는 세상 만들기'로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인종과 계급 차별, 성과 젠더의 차별을 다루고 3절에 이르면 '난민의 인권'을 공부하지요. 전쟁으로 인한 난민, 정치적인 난민, 환경 변화로 인한 난민 등. 아울러 한국 사회의 단골 뉴스인 재중 탈북자 이야기를 나눕니다.

북한 당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불법 체류자로 규정하는 중국의 정책과, 이런 중국 및 북한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조용한 외교'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 언급되지요. 참 민감한 사안입니다.

"탈북자를 난민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찬반 토론해 보고, 그 결과를 토대로 유엔이나 관련 정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공동 제작해보자."


뒤따르는 실천 과제가 이런 식이지요. 이런 교과서로 생각을 연습해본 학생들이라면 아마 정신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와서 한국 정부와 일본 대사관에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고,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팔레스타인 공격에 대해서 이스라엘 대사관에 질문서를 제출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이라크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제출할 수 있을 테지요. 이것이 역사 공부고 사회 학습이며 격동하는 세계화 시대의 갈등을 이해하는 지름길 아니겠습니까.

혹시 걱정하실 어른들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갑자기 예전에 본 TV 토론 프로그램이 생각납니다. 어느 학부모께서 열변을 토하시길, 전교조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주한 미군의 윤금이씨 살해 사건 사진을 보여주고 반미 토론을 유도했다면서 어떻게 신성한 교실에서 그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했었지요.

저는 고등학생 정도라면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있는 그대로 열어놓고 스스로 사고하게 만드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교실에서 보는 사진과 신문에서 보는 사진, 인터넷에서 보는 사진의 차이를 부러 구별한다는 것은 학교를 끊임없이 사회와 유리된 '교육 감옥'으로 만드는 함정이니까요. 미군의 이라크인 포로 학대를 찍은 사진들 역시 우리 아이들이 똑바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지요.

미선이·효순이 추모 촛불집회와 탄핵 반대 촛불집회 때 아이들의 고사리손을 붙잡고 나온 수많은 엄마 아빠들이 바라는 살아있는 교육의 희망도 같을 겝니다.

타문화 이해, 세계화, 인권, 평화, 지속 가능한 발전 등의 개념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데에서는 불편하고 어려우며 재미없는 고민 거리일 수 있지만, 어려서부터 자꾸 체험하고 사고하고 행동해본다면 그만큼 열린 사람으로 성장할 테고 그만큼 우리 사회와 세계도 나아질 수 있을 테지요. 이런 꿈을 내 아이에게 열어주고자 하는 어른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교육이지요.

'고등학생을 위한 국제이해교육'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교과서에는 2장 '동·서양의 만남과 세계화'를 통해 세계화 시대의 지역 차별적 그늘이 어떻게 생겼으며 유지되고 있는지 공부하고, 5장 '음식 문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통해서는 햄버거나 편의점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맥락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교과서는 순서와 상관없이 그때그때 시사적 이슈에 맞게 선택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곧이어 중학생용과 초등학생용 교과서도 개발된다고 하더군요).

한국학, 국제학, 철학, 정치외교학,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아홉 분의 교수가 함께 집필했고, 교육학 쪽의 네 분 교수가 자문했으며,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 다섯 분이 검토위원으로 참여해서 만들어진 교과서랍니다. 각 장마다 참고한 서적과 자료들이 보기 좋게 실려있어서 심화된 공부를 하려는 아이에게는 적절한 길잡이가 되도록 해놓았지요.

아울러 2001년 파리에서 채택된 '유네스코 세계 문화 다양성 선언' 전문도 실려있으니 이 자체가 휼륭한 학습 자료가 되어주지요. 참, 교과서의 디자인과 일러스트 및 사진의 활용에서도 진일보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랍니다.

"비단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만이 우리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학연·지연 등을 중심으로 한 패거리주의, 다른 문화를 거부하는 배타성, 조그만 피해도 참지 못하는 공격성, 체면을 중시하는 허위 의식, 내 것만 소중하다고 믿는 이기주의 등은 우리가 버려야 할 폭력적인 문화 유산입니다. 대신 담장 없는 아파트 단지, 열린 공동체, 가고 싶은 군대, 학생을 격려하는 학교, 아시아인이 평화롭게 일할 수 있는 일터 등은 우리가 일상에서 이뤄야 할 '평화 문화'의 모습입니다."


인용문은 한 언론사의 평화 캠페인 소개글인데 교과서에 고스란히 실려 있지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병폐를 나열하고 있네요.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극복하면서 성장한 아이들의 사회는 지금보다는 분명 더욱 나아져 있을 겁니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교과서를 가지고 전쟁 반대의 필요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스스로 깨치면서 열린 공부를 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 만들기 - 고등학생을 위한 국제이해교육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엮음, 일조각(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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